• 홍보센터
  • 언론속의 운암

언론속의 운암

게시판 내용
[한계레신문]피끓는 조선인들, 혁명열기 좇아 광저우로
관리자
조회수 : 2059   |   2007-12-06


한겨레|기사입력 2005-08-04 19:18 |최종수정2005-08-04 19:18 [한겨레]  광저우를 가로질러 흐르는 주강. 강 한복판에 놓인 장주도에 자리한 황포군관학교에 가려면 배를 타야 한다. 현재 인민해방군 해군기지와 군 조선소가 맞닿아 있는 황포군관학교의 원래 이름은 육군군관학교. 기념관으로 변한 학교에는 ‘청소년 훈련기지’, ‘애국주의 교육기지’라는 안내판이 함께 붙어 있다. 마침 학교를 찾았을 때는 군복을 입은 30여명의 중국 학생들이 한여름 땡볕을 이기며 1주일간의 병영 체험을 하고 있어 예전의 모습을 어림할 수 있었다. 1924년 1월 광저우에서 열린 중국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군벌 타도와 쑨원의 국민혁명 완수를 위한 1차 국공합작이 이뤄진다. 국민혁명과 사회주의혁명 인재를 동시에 길러낸 황포군관학교는 이런 합작의 결과다. 30년대 후반의 우한이 스페인내전을 빗대 ‘동방의 마드리드’로 불리며 항일투쟁의 중심이자 민주주의의 보루로 떠올랐다면, 20년대에는 광저우가 혁명의 도시였다. 당시 광저우엔 쑨원이 국민혁명을 이끌며 군벌들과 싸움을 이끌고 있었다. 중국혁명의 성과를 조선독립과 항일투쟁으로 이어가고자 했던 수많은 한국 청년들이 광저우를 찾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25년 광저우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혁명가들은 대략 60여명. 한상도 건국대 교수(사학)는 “일제의 사찰 정보를 보면, 27년 5월 무렵 광둥 지역의 군사시설에만 230여명의 한국인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운남강무학교를 마친 양림이 광저우에 온 것이 24년이다.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도 25년부터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받기 위해 광저우로 들어온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 뒤 국민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이 충돌하던 학교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사상에 젖어갔다. 님 웨일즈의 소설 <아리랑>에서 김산이 ‘광둥에 온 가장 우수한 조선인 혁명가’로 소개한 박진(박영)도 이때 두 동생과 함께 소련에서 광저우로 들어왔다. 24년 문을 연 광저우의 국립광둥대학(중산대학)은 조선인 혁명가들의 또 다른 거처였다. 26년에만 50여명의 한국 청년들이 입학한다. 김산은 물론 의열단원이자 사회주의 이론가였던 김규광(김성숙), 이활(이육사)도 중산대학의 문을 두드린다. clear=all> 그러나 국공합작이 불러들인 한국인 혁명가들은 합작의 분열과 함께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200여명에 이르렀던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의 한국인 학생 대부분은 합작이 깨진 틈바구니에서 터진 광저우 봉기 등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혁명의 열기가 조선독립의 불길로 이어지길 바랐던 그들은 국공합작의 부침에 따라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20년대 광저우의 경험은 이후 항일 무장투쟁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냈다. 황포군관학교 출신인 김원봉, 박효삼 등의 조선의용대 창설이 대표적이다.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 최용수 교수는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국민당이나 공산당 어느 쪽에도 조선인들은 많았다. 그들은 어느 쪽이든 중국혁명의 완수를 조선독립의 첫걸음으로 보았다”고 설명했다. 광저우/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file0 File #1   |   img.jpg51.jpg
게시판 이전/다음글
이전글 [뉴시스]운암 김성숙 기념사업회, 장학금 전달
다음글 [오마이뉴스]"그날이 오면"의 문승현과 "만인보"의 류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