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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신문]"제1회 운암 김성숙 선생 항일운동 학술대회"
관리자
조회수 : 2114   |   2007-08-30


◇지난 1일 서울 동국대에서 열린 제1회 운암 김성숙선생 항일운동 학술대회.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회장 최문성)는 지난 1일 서울 동국대학교에서 스님 출신으로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김성숙 선생(1898∼1969·태허스님)을 기념하는 ‘제1회 운암 김성숙 선생 항일운동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대회에서는 손염홍(홍익대) 교수의 ‘1920년대 중국지역에서 전개한 김성숙의 민족혁명과 사회주의운동’ 및 한상도(건국대) 교수의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 시기 김성숙의 활동과 정치사상’ 등 논문이 발표됐다. 이 내용을 요약해 싣는다. /편집자 주 ■1920년대 중국지역에서 전개한 김성숙의 민족혁명과 사회주의운동 승려 출신 사회주의 지도자 中서 폭넓은 민족혁명 전개 김성숙은 승려 출신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고 열혈적 민족운동을 전개한 인물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독특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18세 되던 1916년 출가하여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뒤 1923년 중국 북경으로 망명했다. 북경에서 민국대학(民國大學)에 재학 중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의열단에 가입, 1920년대 중후반 북경과 관주지역 한인 사회주의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했으며 광주봉기 등 중국대혁명에도 투신했다. 1936년 조선민족해방운동 결성한 후 1937년 각 세력의 통합단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여 민족협동전선을 추구했다. 이어 1941년 중경 임정에 참여했으며, 해방 후 귀국해서는 민족통일을 위해 좌우합작에 힘썼다. 이처럼 김성숙은 20여년 넘게 중국 대륙을 무대로 삼아 다양하고도 폭넓은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김성숙의 민족운동은 1920년대와 1930년대, 임정에 참여하는 1940년대 전반 등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 각 시기별 규명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김성숙의 1920년대 활동무대는 북경과 광주일대였다. 그가 북경에 있던 1923∼1925년 동안 북경 한인민족운동이 가장 활발했고, 민족운동노선도 민족주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등 다양한 노선으로 분화되어 있었다. 김성숙이 활동무대를 광주로 옮긴 1925∼1928년 동안 중국은 혼란과 변혁의 시기였다. 이때 중국 전역에서는 전국통일을 위한 북벌이 추진되고 있었고, 광주에서는 중국공산당에 의한 광주봉기가 일어났다. 이때 많은 한인들이 중국 공산주의혁명 대열에 참여했다. 김성숙에게 1920년대는 한국의 민족운동 뿐 만 아니라 중국 혁명의 한가운데 서서 보냈던 시기였다. 김성숙은 1920년대 의열단에서 활동했다. 북경에서는 학생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하면서 반역사 활동을 통해 의열단과 관계를 유지했다. 1925년 후반에 들어 그는 북경의 장작림 군벌정권의 탄압이 강화되던 상황에서 의열단 본거가 있는 관주로 옮겨 의열단 간부이자 이론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김성숙의 혁명운동은 민족혁명과 사회주의운동을 동시에 수행했지만 ‘혁명’의 주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민족혁명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혁명운동의 방향은 그가 쓴 ‘혁명운동’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공산당과 민족적 대혁명당의 통일 지도 아래 각각 진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공산당의 비밀조직‘KK’를 조직하고, 의열단을 대중적 혁명조직으로 개편했다. 하지만 그의 혁명운동은 중국 국민혁명의 실패와 함께 좌절되고 말았다. 그는 국공합작이 무너지고 중국 국민혁명이 실패하게 되자 중국 공산당진영에 가담했다. 그리고 중공의 지시에 따라 무한에서 주로 한인들로 구성된 교도단 제2영 제5련 조직 책임자를 맡아 광주봉기에 참가했다. 그러나 광주봉기가 실패하자 광주를 떠나 1930년대 중반까지 혁명운동에 나서지 않은 채 문필 생활을 했다. 김성숙의 민족운동 가운데 1920년대 활동은 중요하다. 그는 이 시기에 학생운동, 의열단운동, 사회주의운동 및 중국대혁명 등 현실적 정치투쟁을 통해 혁명운동의 폭을 넓혀갔다. 그리고 의열단 활동을 통해 유자명과 김원봉 같은 민족혁명운동의 거물과 친교 해 훗날 민족운동의 협동전선을 결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중경 임정 시기 김성숙의 활동과 정치사상 韓人 단결·통일 필요성 공감 "반공 노선" 臨政에 합류 활동 중일전쟁 후 김성숙은 1936년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을,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을 각각 조직하여 상임이사·선전부장 등으로 활약했고,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지도위원·정치부장으로 등으로 지도부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중국 국민당정부 한인세력 재편성 시도, 조선의용대 주력의 중국공산당 관할구역 이동, 태평양전쟁 발발 등 환경 변화는 그로 하여금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 활동에 합류토록 이끌었다. 김성숙은 임정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러한 그가 충칭(重慶)으로 와서 공산주의 정당을 지향하는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 간판을 유지 한 채 ‘반공노선’을 표방하는 임정에 합류했고, 나아가 임정을 중심으로 한 한인세력 단결을 주장한 사실은 아이러니일지도 모른다. 김성숙, 박건웅 등이 중심이 된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운신은 독립운동시기 한국공산주의운동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국제주의노선을 추구하면서 중국 관내지역에서 활동하던 한인공산주의자들이 중국 화북과 동북지역으로 둥지를 옮긴 뒤에도, 더욱이 반공을 이념적 기반으로 한 중국 국민당정부 통치구역에서도 이들은 공산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1938년 개최된 ‘한국혁명운동통일7단체회의’ 시기를 전환점으로 일제 말기 충칭(重慶)의 임정체제에 합류한 그는 한인세력 일각으로부터 ‘공산주의자’라는 질시를 받으면서도 임정을 중심으로 한 한인세력의 단결과 통일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스스로 임정에 참여했다. 분산되고 갈등마저 빚었던 독립운동정당 단위의 세력을 임정이라는 정부 단위의 대통합으로 묶어냄으로써 한인세력의 통합체제로서 임정이 전후 국제질서 재편성 과정에 참여 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주어야 한다는 요지였다. 이 같은 논리는 1920년대 중반 중산대학(中山大學) 입학과 중국 광주봉기 주도적 참여, 1930년대 중국 국민당정부를 파트너로 한 조선민족전선연맹 및 조선의용대 활동 등을 통해 단련되고 다듬어진 그의 민족운동관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 포부는 때로는 보수적인 다수의 무기력함에 묻혀 버렸고, 한 진보적 민족주의자는 ‘진짜 빨갱이’ ‘기회주의자’ ‘분파분자’라는 낙인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김성숙 한사람의 고뇌와 좌절에 국한된 사실이 아니고 이데올로기 벽을 뛰어 넘어 꿈과 이상을 좇았던 진보적 민족주의 노선의 좌절과 탄압을 뜻하는 것이다. 모순과 조화가 뒤엉켜 스스로를 옥죄었고, 냉전체제와 분단시대에 직면하여서는 파탄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던 김성숙의 정치역정은 한국현대사의 경직성과 독단을 함축하고 있다. 세기가 바뀌고, 패러다임도 변해버린 21세기 초두의 한국현대사는 김성숙의 존재가치와 그가 지향했던 한국혁명의 이상과 좌절을 되짚어 보기를 바란다. 정리=이연진기자 /lyj@segye.com ( 2007/08/28 15: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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