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보센터
  • 언론속의 운암

언론속의 운암

게시판 내용
[법보신문]태허 스님 중국 항일운동 유적지를 가다 (下)
관리자
조회수 : 2154   |   2007-08-29


대륙 밤 밝힌 민족 독립 열망 ‘남북 평화 통일’로 계승하리 “말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고, 역사라는 일람표 위에 갈겨 쓴 낙서처럼 인간집단 속으로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존재, 한여름에 흩날리는 눈송이와도 같은 존재, 그 존재는 현실인가 꿈인가, 좋은가 나쁜가, 귀중한가 무가치한가?” (로베르토 무질 ‘통가’ 중) 1945년 해방, 허나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조국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 조차 두 동강이 내고 말았다. 8월 11일 탐방단은 독립운동사의 조각 속에 살아 숨 쉬는 태허(운암 김성숙) 스님의 항일운동 발자취를 좇아 꾸이린(桂林)에 도착했다. ‘계수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곳’ 꾸이린. 빼어난 풍치로 예로부터 시인과 화가들에게 글과 그림의 소재가 되었고 현재도 세계적인 관광지라는 명성을 얻은 곳이다. 그러나 천하제일의 산수를 자랑한다는 꾸이린에서 탐방단이 마주한 것은 스러져가는 유적지에 대한 진한 아쉬움뿐이었다.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은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이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1938년 10월 우한(武漢)에서 조국독립을 기치로 창설된 중국 내 최초의 한인 무장단체 조선의용대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베이징(北京)과 텐진(天津)을 차례로 점령한 일본군이 상하이(上海)에 이어 1937년 12월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南京)을 점령하여 양민 수십만을 살육하였다. 마침내 일본군의 총칼이 우한을 겨누자 1938년 12월 조선의용대는 꾸이린 수동문외 동녕가 1호로 본거지를 옮기면서 태허 스님도 이곳과 인연을 맺는다. 주소만 남은 유적지에 아쉬움 탐방단은 조선의용대가 ‘조선의용대통신’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했던 해방서로 16호로 향했다. 당시 조선의용대는 무장 항일투쟁보다 정치 선전 공작에 주력했다. 반전 반군의 내용이 담긴 전단과 홍보물을 일본군 진영에 살포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한다. 이 때 태허 스님은 유자명, 한지성 등 8명의 편집위원과 ‘조선의용대통신’ 중국어 발간을 책임졌다. 정치조장이라 불리던 그는 1940년 조선의용대가 충칭(重慶)으로 이동할 때까지 이곳에서 ‘조선의용대통신’을 발간하며 정치 선전에 매진했다. 중국 정부와 국민들에게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알리며 공감대를 이끌어 내는데 열과 성을 다했던 태허 스님. 그의 열정을 더듬어 가슴에 새기려는 탐방단의 모습은 현지 어린이의 눈에 비친 호기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윽고 탐방단은 조선의용대가 꾸이린에 처음으로 정착한 수동문외 동녕가 1호를 찾았지만 현재 그곳은 칠성공원으로 조성돼 그 흔적조차 없었다. 푸른 잔디와 나무 몇 그루만이 탐방단을 반겼다. 이후 조선의용대가 일본군의 폭격을 피해 이동한 수동문외 시가원 53호 역시 주변일대가 개발되고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었다. 탐방대원 강현모(건국대 산업공학과) 학생은 “설명만으로는 태허 스님을 비롯해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분들의 활동과 그 의미를 되새기는 데 무리가 있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지나간 삶을 추억하는 것은 그 삶을 다시 한 번 사는 것”이라는 고대 로마 시인 마티에르의 말을 위로 삼을 수밖에. 충칭 임정서 해방 감격 음미 다음날 탐방단은 마지막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가 있었던 충칭(重慶)에 들어섰다. 충칭은 1940년 임정이 중일전쟁 여파로 수도를 충칭으로 옮긴 장개석(蔣介石) 국민당 정부를 따라 이곳에 자리한 뒤 해방을 맞은 뜻 깊은 지역이다. 또 1942년 태허 스님이 민족주의 좌파 인사로 임정에 합류하며 “임시정부 사람들과 당은 함께 할 수 없어도 정부는 같이 할 수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독립이 이데올로기보다 최우선임을 강조했던 그의 민족주의 사상이 엿보인다. 아침 일찍 탐방에 나선 탐방단이 찾은 곳은 김구가 『백범일지』 하권을 집필했던 화평로 2항 5호 임정 청사. 이곳은 1945년 1월 임정이 연화지 4호로 청사를 옮긴 후 임정 요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전형적인 2층 목조 가옥 형태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는 청사는 주먹으로 한 대 치면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이미 복원을 위한 실측을 마쳤다는 박걸순 지도교수의 말에도 우려 섞인 눈길을 거둘 수 없었다. 탐방단은 당시 임정 요원들의 출근길을 따라 해방 전까지 임정이 사용하던 마지막 청사로 향했다. 임정 요원들이 독립이라는 시대적 고민을 어깨에 짊어지고 걸었던 좁은 이 길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떼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뭘까. 독립을 갈망하던 그들의 치열했던 삶의 무게가 60여 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전해지는 듯하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해방을 맞은 마지막 임정 청사. 이곳은 1995년 충칭시가 시(市)급 문화재로, 1997년 충칭이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성(省)급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타 유적지에 비해 보존이 잘 돼 있었다. 임정 요원들의 자취를 살피던 탐방단은 청사 계단에서 기념촬영을 하며 자주 독립은 아니었지만 꿈에도 그리던 해방을 맞았던 임정 요원들의 감격을 음미했다. 1940년 8월 일본과 본격적인 무력투쟁을 전개할 발판이 된 광복군이 창설됐다. 그러나 총사령부를 찾았던 탐방단을 맞이한 것은 ‘미원’이라는 음식점과 이미 건물들이 들어선 연병장 자리였다.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 본부 터, 1942년 7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한 조선의용대 본부는 옛 자취를 찾을 길이 없었다. 탐방단은 45인승 버스가 간신히 움직일 수 있는 길을 따라 1942년부터 태허 스님과 부인 두군혜 여사, 첫째와 둘째 아들의 보금자리였던 대불단 정가 57호를 찾았다. 하지만 ‘반가혜점(胖哥鞋店)’이라는 신발가게 간판을 확인했을 뿐이다. 광복 62주년을 이틀 앞 둔 8월 13일 저녁 베이징. 탐방단은 태허 스님과 그를 정신적 스승으로 섬겼던 김산(장지락)의 자손들과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다. 태허 스님이 두군혜 여사와 부부의 연을 맺고 낳은 둘째 아들 두젠(杜鍵·74) 씨와 김산의 아들 고영광(高永光·70) 씨, 그리고 김산의 친손자 고우원(高雨原·35) 씨는 탐방단에게 한 목소리로 당부의 말을 전했다. “조국의 대학생들이 선조의 독립운동과 그 정신을 잊지 않고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 받았습니다. 앞으로 두 동강이 난 조국이 통일하는데 큰 힘이 되어 주길 바랍니다.” 운암-김산 후손과 만나다 1945년 12월 해방된 조국으로 태허 스님이 환국하면서 사실상 생이별을 해야 했던 두젠 씨. 현재 베이징 중앙미술학원 교사인 그는 ‘아버지가 원망스럽지 않았냐’는 질문에 오히려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원망은 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무사한지, 건강은 어떤지 늘 걱정이었다”며 “시간만 나면 나와 형, 동생에게 수영과 연 날리기를 가르쳐 주셨다”고 혁명가로서의 아버지와 자상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태허 스님의 평생 동지였던 김산의 아들 고영광 씨는 “아버지가 공산주의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에 조국에서 인정받지 못해 억울했지만 늦게라도 훈장을 전해준 한국 정부에 감사하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역만리에서 독립을 위해 공산주의라는 방편을 택한 이들의 설움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하랴. 짧은 만남 후 두젠 씨와 고영광, 고우원 씨는 탐방 대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지난 8월 15일 인천 공항에서 8박 9일간 태허 스님 및 독립운동가들의 중국 내 항일 유적지를 숨이 가쁘게 탐방했던 대원들이 해단식을 가졌다. 기실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조명하고 되새기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 ‘남성다움’이라는 고정관념을 날카롭게 파헤친 독일의 역사학자 조지 L. 모스는『남자의 이미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현재의 인간들이 무엇을 지나간 시대의 진실로 여기는가가 중요하다”라고. 최호승 기자 sshoutoo@beopbo.com 914호 [2007-08-29]

file0 File #1   |   img18.jpg
게시판 이전/다음글
이전글 [법보신문]광동에서 유학한국혁명청년회 창립
다음글 [종교신문]"제1회 운암 김성숙 선생 항일운동 학술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