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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줌]운암 김성숙선생 항일사적 탐방단 "무한서 선생 첫 흔적 접하고 숙연"
관리자
조회수 : 2526   |   2007-08-20


섭씨 40도를 웃도는 살인적인 무더위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선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제2기 운암 김성숙 선생 항일운동 사적지 대학생 중국탐방단’(이하 탐방단)의 발걸음은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이어졌다. 탐방단은 사흘동안 선생의 주 활동무대이던 무한, 광주, 계림 등을 돌아보며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가슴에 새겼다. ▲제3일-무한 중국 무한(武漢)에 당도한 탐방단이 탐방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운암의 발자취와 마주쳤다. 운암이 몸담았던 조선민족전선연맹 자리를 방문한 것.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11월 독립운동 세력중 혁신계열을 이끌던 김원봉은 남경(南京)에서 좌파세력을 규합, 조선민족전선연맹(민족전선)을 결성했다. 민족전선에는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과 운암의 조선민족해방동맹, 유자명의 조선혁명자연맹 등이 참가했다. 그해 12월 일본군에 의해 남경이 함락되기 직전 민족전선은 무한으로 이동, 무한을 가로지르는 양자강(楊子江) 북안에 위치한 한구(漢口)에 자리잡았다. 민족전선은 한구 대화가 15번지 동명면옥에서 ‘조선민족전선’이란 기관지를 발행했다. 당시 운암은 이 기관지의 편집을 맡았다. 그동안 탐방단은 상해 임시정부, 천령사 등을 둘러봤지만 운암이 연관되어 있는 곳일뿐, 그가 직접적으로 활동을 한 곳은 아니었다. 운암이 실제로 활약했던 곳을 최초로 방문한 셈. 하지만 그곳은 그 옆 건물 사우나의 차고로 사용되고 있었다. 황원엽(20·중앙대 도시공학1)씨는 “선생의 유적지가 차고로 쓰여 안타깝기 그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데 이렇게 둘러볼 수 있다는 것도 크나큰 기회”라고 말했다. 한편 탐방단은 이곳 외에 옛 중앙군가정치학교 무한분교, 조선의용대 창설지 등을 둘러봤다. ▲제4일-광주 탐방 4일째를 맞은 탐방단은 운암 김성숙 선생과 인연이 깊은 도시 광주(廣州)를 찾았다. 광주는 운암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곳이다. 운암은 이곳에 위치한 중국 중산대학을 졸업했고, 1927년 광주기의(廣州起義)에도 참여했다. 광주기의란 광주에서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에 반대한 공산주의자들이 1927년 12월12일 봉기, 공산당 정권(광동코뮌)을 수립했으나 장개석의 국민당에 패배하고 5000여명이 희생된 채 ‘3일천하’로 끝나버린 사건을 말한다. 광주기의에는 선생을 비롯 님 웨일즈의 소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장지락), 오성륜 등 당시 혁신계열의 청년 독립운동가 대부분이 참여했다. 실제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광주시내에 조성된 ‘광주기의열사능원’ 내에는 기의에 참여한 한국인들을 기리는 내용이 적힌 ‘조선열사기념비’(朝鮮烈士記念碑)가 세워져 있다. 광주기의의 실패로 독립운동과 투쟁에 염증을 느낀 선생은 대학 동문이자 역시 사회주의자인 중국인 두군혜 여사와 결혼, 한동안 독립운동과 거리를 두고 상해(上海)에 정착해 사회주의 저서 출간 등에만 전력한다. 탐방단은 황포군관학교, 대한민국임시정부 판공처(현 동산호공원), 중산대학 등도 같이 방문했다. ▲제5일-계림 탐방단은 탐방 5일째를 맞은 11일 중국 화남지방의 명승지 계림(桂林)을 방문했다. ‘계림의 산수는 천하 제일이다’(桂林山水甲天下)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계림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다. 특히 독특한 모양의 기암괴석으로 유명하다. 중일전쟁으로 1938년 10월 무한(武漢)이 함락되자 무한에 본거지를 두고 있던 조선의용대가 계림으로 옮기면서 운암 김성숙 선생도 이곳과 인연을 맺었다. 운암은 1940년 조선의용대가 중경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머물면서 기관지 ‘조선의용대통신’을 발행하며 무장투쟁보다는 정치선전에 주력했다. 그가 조선의용대 내부에서도 몇 안되는 학사(중산대학) 출신의 ‘엘리트’인 까닭이었다. 조선의용대는 계림에서 세번이나 옮겨다녀야 했다. 그 시절 독립운동단체들이 그러했듯 조선의용대도 자금조달이 쉽지않아 임대료를 제때 내지 못했다. 그래도 선생은 이곳에서 독립에 대한 열망을 키웠고, 1940년 중경(重慶)으로 건너가 김구 주도의 임시정부에 합류, 좌우합작을 이룬다. 탐방단은 계림에 있던 세 곳의 옛 조선의용대 자리인 해방서로, 칠성공원, 시가원 등에 있던 유적지를 모두 둘러봤다. 물론 세 곳 다 새로운 건물과 공원이 들어서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조아름(21·경희대 경제학과3)씨는 “계림이 관광지인줄만 알았는데 선생님이 이곳에서도 독립투쟁을 했다니 놀랍다. 하지만 당시 건물 없이 터만 남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국가 차원에서 대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작성자 : 신상윤 / 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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