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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운암 김성숙]14. 봉선사 중심 만세운동 계획
관리자
조회수 : 2126   |   2007-04-16
[운암 김성숙]14. 봉선사 중심 만세운동 계획
기사등록일 [2007년 04월 16일 월요일]
 

지월 스님 등 4명 주도
주민에 돌릴 격문 완성

성숙이 봉선사로 돌아와 3·1만세시위운동을 이어갈 방도를 모색하는 동안 그의 동지 김법린을 비롯하여 만해 스님의 지시를 받은 불교중앙학림 학생들은 3월 1일 밤에 전국의 지방사찰로 떠나 지역 사찰을 중심으로 만세시위운동을 이어갔다.

이들의 활약에 따라 지방에서는 범어사, 해인사, 통도사, 동화사 등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이 전개되었고, 그 중에서도 범어사를 중심으로 한 동래 일원의 시위는 규모 면에서도 서울의 시위에 뒤지지 않았다. 중앙학림의 학생대표 김법린과 김상헌 등은 3월 4일 범어사 내의 명정학교 학생 30여명과 함께 결사대를 조직해 3월 7일 동래 장날에 첫 만세운동을 펼친 데 이어, 3월 18일 범어사 일대에서 또 다시 만세운동을 벌이다 100여명이 일본 헌병대에 연행되기도 했다. 이른바 ‘동래고보(東萊高普)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이 만세운동을 벌이다 연행된 사람들 가운데 31명이 1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들 31명 가운데는 훗날 성숙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활동을 하다가 변절하여 김좌진 장군 암살의 배후로 지목 된 김봉환도 끼어 있었다.

범어사에 이어 통도사에서도 3월 13일 양산시장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벌였고, 해인사는 3월 31일 오전 11시 지역 주민들과 함께 3·1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해인사에서는 4월 16일 1만여 명의 대중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운동이 펼쳐지기도 했다. 또한 동화사 스님들도 대구 시내로 들어가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는 등 전국의 크고 작은 사찰 1천여 곳에서 공부하던 젊은 스님들이 인근의 군중을 모아 지속적으로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3·1운동이 시작된 역사적 현장에서 수많은 군중들과 함께 목청껏 만세를 불렀던 성숙도 3월 1일 이후 전국에서 전개되는 만세운동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봉선사를 중심으로 한 만세운동 계획을 세워나갔다.

성숙은 3월 7일 있었던 부산 동래 장날의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고, 며칠이 지난 10일 밤에 이순재(지월 스님), 김석로, 강완수 등 봉선사 스님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성숙이 “우리도 본격적으로 거사 일정을 잡아야 하겠습니다”하고 말문을 열자, 평소에도 의협심이 강하고 정의감이 앞섰던 지월 스님이 “더 이상 미루면 시기를 놓칠 수 있으니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봅시다”하면서 말을 받았다. 김석로와 강완수도 묵묵히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숙과 이순재 등 4명은 다른 지방에서의 만세운동 일정을 살펴보고는 4월 2일을 거사 일정으로 잡고, 양주군 광천시장에서 만세시위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그리고 봉선사 소유 토지를 관리하는 농감을 맡고 있던 이순재가 각 동리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인원동원을 책임지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날 밤에 봉선사 서기실에 다시 모인 4명은 비밀리에 독립문서를 만들어 일반 민중들에게 배포할 계획을 세우고는 ‘조선독립단 임시사무소’명의로 격문의 내용을 정리했다.

성숙 일행은 ‘(중략)지금 파리강화회의에서는 12개국을 독립국으로 만들 것을 결정하고 있는 모양이며, 조선도 이 기회에 극력 소요를 영속시켜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중략)’는 내용의 격문 내용을 완성했고, 성숙은 이 격문을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편집했다.

그리고 다음날 밤 다시 모인 성숙 일행은 봉선사 서기실에 있던 등사기를 짊어지고 산으로 올라갔다.
 
sjs88@beopbo.com 


897호 [2007-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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