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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일보]-장외시위ㆍ거리투쟁 일상화… 제2공화국 민주당 분열 ‘단명’
관리자
조회수 : 3055   |   2007-03-19


▲ 윤보선 의원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양원 합동회의는 만세삼창으로 새정부의 출범을 축복했다. 장외시위ㆍ거리투쟁 일상화… 제2공화국 민주당 분열 ‘단명’ 격동 한국선거사 - ⑪제5대국회 2007-03-14 일 16 면기사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하고 이틀 뒤 이기붕 일가가 자살함으로써 자유당 지도부는 무너지고 허정 과도정부가 들어섰다. 허정 과도정부 하에서 민주당 구파와 자유당의 주도하에서 6월 15일 의원내각제에 입각한 개정헌법이 공포되었다. 이어 국회의원 선거법 역시 민의원(하원)과 참의원(상원)제도로 바뀌어 처음으로 양원제가 채택되었다. 그 해 7월 29일 제5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일제히 실시되었다. 선거는 민의원과 참의원으로 나누어 둘 다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하되, 민의원은 최다수 득표자 1인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를, 참의원은 선거구별 다수득표자 2~8인을 선출하는 중·대선구제를 채택하였다. 의원 정수는 민의원이 233명, 참의원이 58명이었다. 입후보등록을 받은 결과 민의원정수 233명에 1562명이 입후보하여 평균 6.7 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민의원선거의 투표율은 84.3%, 참의원 선거 투표율은 84.1%로 역대 국회의원 선거 중에서 가장 저조한 선거참여율을 보였다. 1~4대 국회의원 총선거 참여율이 90% 이상 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투표율은 저조했다. 낮은 선거참여율은 민주당 내의 신·구파의 싸움이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인물중심의 선거에 유권자들의 관심이 차츰 식어가고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7.29 총선은 자유당이 이미 몰락하여 보수진영 내에서 경쟁상대가 없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민주당의 압도적 승리가 점쳐졌다. 민주당은 외견상 “독재와 싸운 정당 마음 놓고 찍어주자”는 슬로건을 들고 나와 ‘독재심판론’을 주창하였다. 그러나 선거는 실제로 민주당 내의 신·구파간의 권력투쟁전의 성격을 띠었다. 민주당은 이승만의 억압정책이 장기화하면서 반대급부로 부상하게 되었다. 민주당은 독자적인 정당이념이 있다기보다는 ‘이승만에 반대하는 온건 보수 세력의 집합체’였다. 따라서 창당초기에서부터 구파와 신파로 나누어 정파 간 세력투쟁을 일삼았다. 구파는 민국당의 지주세력을 중심으로 한, 일제 시대 독립운동이나 정치를 했던 지사형의 인사들인 신익희, 조병옥, 김준연, 윤보선, 유진산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신파에는 이승만으로부터 소외된 관료나 자유당 출신들과 흥사단, 기독교계의 인사들이 연합하고 있었다. 장면, 오위영, 조재천, 엄상섭등의 관료, 법관, 또는 금융계 출신의 전문인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신·구파는 공천에서부터 선거전과정을 통하여 치열한 선거쟁탈전을 벌였으며 구파가 83석을 확보하여 75석을 확보한 신파에 신승하였다. 구파의 윤보선, 유진산, 김도연, 서범석, 김산 등이 당선되었고, 신파로는 장면, 정일형, 민관식, 김윤식, 태완선 등이 당선되었다. 선거의 또 다른 특징은 보수정당과 혁신정당간의 대결이었다.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혁신동지연맹 등이 혁신정당진영을 형성하였다. 이승만 정권이 붕괴로 인해 혁신세력의 부활과 활발한 정치적 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혁신세력은 보수온건정파인 민주당보다는 더욱 강력하게 4월혁명의 완수를 주장하며 선거과정에서 혁명의 계승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혁신인사들로는 전 진보당의 박기출, 김달호, 윤길중과 전 근로인민당의 김성숙, 유병묵, 그리고 전 민주혁신당의 서상일, 이동화 등 3파 합작으로 조직된 사회대중당은 가장 강력한 정당으로 부상하였다. 그리고 한국사회당에는 전진한, 김무진, 김성수, 안정용, 김철, 그리고 성낙훈, 박재하, 박부산, 양우조 등의 인사가 참여하고 있었다. 이 두 혁신정당은 보수 정당인 민주당과 대결하면서 제5대 국회의원선거의 주요 관심 포인트가 되었다. 그러나 “독재와 싸운 정당 마음 놓고 찍어주자”라는 구호아래 명사들을 앞세 운 민주당을 이길 수 없었다. 선거는 정책중심이 아닌 이승만 정권의 심판과 인물중심으로 흘러갔다. 따라서 혁신세력은 참의원선거에서 사회대중당 4석, 한국사회당 1석을 얻은데 만족해야만 했다. 서울 제7지구에 출마한 최고의 혁신세력 간판 스타였던 전진한도 현격한 표차로 2위에 머물러야만 했다. 그러나 서상일, 윤길중, 김성숙 등은 지방에서 선전하여 당선되었다. 4.19 혁명이후 치루 어진 선거여서, 선거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자연스럽게 3.15부정선거 관련자, 부정행위에 항거하는 시민에 대하여 살상 및 탄압을 일삼은 자, 반민주행위자, 그리고 부정축재자의 처벌 등이 부각되었다. 과거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서 자신의 기반을 확보했던 자유당원들과 그 동조세력이 도처에서 출마하게 되자, 4.19혁명의 주체세력으로 자처하는 일반학생과 시민들이 자유당 관계자의 출마를 반대하여 선거사무소와 가옥을 공격하는 폭력사태가 도처에서 발발하였다. 그 결과 5대 총선은 관권의 간섭과 압력은 없었으나 그 대신 자유당세력의 출마제지를 위한 행동대의 탄생으로 사상 초유의 폭력과 난동의 선거가 되고 말았다. 전국에서 300여개의 투표함이 방화·파괴되고 선거소송은 무려 1371건에 달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이 개표 도중 자유당 계열 후보자들에게 유리한 선거구의 투표함을 소각하거나 파괴함으로써 재선거를 실시된 지역도 발생하였다. 선거결과는 민의원 의석 233석 중에서 민주당이 175명, 주로 민주당 공천탈락자나 자유당 탈당자인 무소속이 49명, 사회대중당이 4명, 자유당이 2명, 통일당과 한국사회당이 각각 1명의 순으로 당선되었다. 정당별 유효 득표에 있어서는 민주당이 41.7%를 획득하였고, 사회대중당이 6%를 획득하여 제2정당이 되었다. 참의원 58석 중에서는 민주당이 31명, 무소속이 20명, 자유당이 4명, 사회대중당과 한국사회당이 각각 1명, 그리고 기타 1명의 순으로 당선되었다. 불과 몇 달 만에 자유당은 과반수 이상 의석의 집권당에서 정당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반면에 민주당은 민의원 의석의 2/3이상인 175석, 참의원 58석의 절반이상인 31석을 차지하여 집권정당으로 발돋움하였다. 자유당은 1인 지도자의 진퇴에 따라 명멸하는 지도자정당, 거품정당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4월 26일 하야한 이승만 대통령이 5월 한 달 동안 거취를 정하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동안,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이승만의 정계복귀를 기대하며 ‘정치철새’로 대기상태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승만이 6월 초 하와이로 망명길에 오르자, 3일 만에 138명 중 105명 정도가 당을 집단으로 탈당했다. 따라서 7월29일에 실시된 5대 국회의원 선거 이전에 이미 자유당은 붕괴하고 있었다. 이처럼 자유당은 이념적 유대나 제도적 장치 없이 카리스마적인 이승만 개인의 권력에 의해 형성되고 유지되었기 때문에, 유리한 정치적 환경(민주당의 파벌투쟁, 자유당과 민주당 구파와의 우호적 관계, 미국의 자유당존속 희망, 과도정부의 비혁명적 성격 등)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비호를 받지 못하게 되자 거품처럼 쉽게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7.29 총선으로 집권한 민주당은 1인 지도자에 의존했던 자유당과는 반대로 지도자 없이 사분오열되어 세력대결을 일삼았다. 1960년 8월 12일 양원합동회의에서 윤보선 의원을 제4대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8월 19일 장면을 국무총리로 인준함으로써 내각책임제의 제2공화국정부가 수립하였다. 갑자기 비대해진 민주당은 밤낮없이 권력투쟁을 벌이다 61년 2월 결국 분당의 과정을 밟게 되었다. 이러한 민주당의 분열과 정당사회의 불안은, 4.19혁명이후 터져 나온 부정부패한 반혁명세력 처단문제, 자주통일에 대한 욕구, 각종 민생현안 등을 다스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학생들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기층 민중들도 여기에 가세하여 장외시위와 거리투쟁은 일상화되었다. 7.29 총선으로 건설된 제2공화국은 민주당의 분열로 인해 단명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장수찬 <목원대 교수>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본문인용 등의 행위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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