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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운암김성숙]-6. 불교 강원도 일제통치 영향에 들다
관리자
조회수 : 1978   |   2007-02-13
6. 불교 강원도 일제통치 영향에 들다
기사등록일 [2007년 02월 12일 월요일]
 

총독부령에 강원체계 흔들
지방학림 봉선사 교과 근거
용문사서 사미 과정 공부

성숙은 1916년 12월 3일 출가 득도식을 갖고 도첩을 받기 전까지 용문사에서 행자생활을 했다.

원산에서 풍곡신원 스님을 따라 용문사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스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출가승려가 지녀야 할 덕목은 물론이고, 각종의례와 경전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절에서 볼 수 있는 경전은 모두가 한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문을 잘 알지 못했던 대부분의 행자들은 천자문부터 배우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성숙은 이미 한문을 잘 알고 있었던 터여서 불경을 배우는 속도가 아주 빨랐다.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가 직접 가르치던 글방에서 공부를 한 덕분에 한문을 배워 사서삼경을 보았고, 신식학교인 대한독립학교에서 신학문을 3년 가까이 익혔었다. 대부분 먹고살기가 힘들어 배움이 짧았던 당시 상황에서는 아주 유식한 행자일 수밖에 없었다. 성숙보다 50년 가량 먼저 태어나 한국 근대 선종의 중흥조가 된 경허 스님도 열 살이 넘어서야 한문을 배웠다고 전해지고 있으니, 이에 비교해봐도 성숙은 출가 전에 많은 글을 배운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남들보다 경전을 배우는 속도가 빨랐던 성숙은 6개월의 행자생활을 마치고 그해 12월 3일에 풍곡신원 스님을 은사로 출가 득도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현대 강원의 사미과에 해당하는 과목들을 공부하게됐다.

성숙이 강원교과목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에는 불교의 강원교육 역시 근대식 학교의 설립 이후 일본의 점령에 따른 교과과정 변화 등으로 상당부분 변해 있었다. 불교인들의 염원으로 1906년 세워진 명진학교가 1908년 불교사범학교로 이름이 바뀔 때까지만 해도 포교에 힘쓸 인재를 양성한다는 목적이 뚜렷했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강원교육과 신학문이 혼용되기는 했으나, 포교에 나설 수 있는 인재양성이라는 목적에 맞도록 교과목이 편성되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불교교육도 일제의 통치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일제는 1911년 8월 23일 조선교육령을 발표한 후 한국인을 일본 국민으로 육성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일본어를 비롯해 일본역사, 일본지리 등을 교과과정에 편성하도록 강압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불교사범학교에 진학하는 스님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그 여파로 정상적인 학교운영이 불가능하게 됐다.

이때 일제의 야욕으로 인한 외부적 교육환경 뿐만 아니라 불교 내적인 상황도 급변했다. 불교계 지도층 인사들이 불교교육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모아 원종 종정으로 추대했던 이회광이 1910년 일본 조동종과의 연합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복속시키려는 불평등조약을 맺은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일본불교와의 불평등조약이 알려지자 호남과 영남을 중심으로 임제종이 설립되었고, 한국불교는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불교계 상황이 이렇게 나빠지면서 원종 총무원에서 운영하던 불교사범학교도 그 영향을 받아 선생들은 선생들대로,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각자가 본래 소속되어 있던 사찰로 돌아갔다. 이렇게 꺼져가던 불교교육의 불씨는 홍월초 스님이 1912년 교단의 대표자에 해당하는 여러 인사들을 초대하면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대표자들은 한 자리에 모여 불교의 장래를 위해 법률 내에서 적극적으로 화합하고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이에 따라 1914년 불교사범학교가 고등불교강숙으로 이름을 바꿔 다시 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총독부가 전문학교 교칙 및 사립학교령을 근거로 중앙에 전문학교 정도에 해당하는 중앙학림을, 그리고 지방에는 보통학교 및 중학교 과정인 지방학림을 인가함으로써 보통학교-지방학림-중앙학림으로 이어지는 3단계의 근대식 승가교육제도로 변화되었고, 불교교육은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이후 불교계에서 새로운 교육의 변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1920년대 후반의 전통적인 강원교육 부흥운동이었으니, 성숙은 강원교육 체계가 혼미한 상황에서 사미교육과정을 공부하게 된 셈이다.

이에 따라 성숙은 지방학림 정도에 해당하는 경기도 종교 대본산 봉선사의 교육제도를 따랐던 용문사에서 『조석송주』를 비롯해 『사미율의』, 『반야심경』, 『예참』, 『초발심자경문』, 『치문경훈』 등을 배우기 시작했다.

sjs88@beopbo.com


889호 [2007-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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