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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운암김성숙]-5. 1916년 12월 출가 득도하다
관리자
조회수 : 2440   |   2007-02-05
5. 1916년 12월 출가 득도하다
기사등록일 [2007년 02월 07일 수요일]
 

우여곡절 끝에 봉천행 포기
신흥학교 대신 용문사 출가
풍곡신원 스님 은사로 득도

<사진설명>1916년 12월 3일 득도식 후 받은 도첩.

독립군이 되겠다고 결연한 각오로 만 18세가 되던 1916년 봄 고향을 떠난 성숙은 신흥학교가 있는 만주 봉천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집안 삼촌에게 독립군을 양성하는 학교라고 들은 신흥학교는 1911년에 만들어진 무관학교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이 맺어진 다음해인 1907년 공화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민족주의자들은 신민회를 조직했고, 대한제국의 멸망이 임박했다고 판단한 신민회의 지도자들은 1909년 해외에서 독립군을 창설하고 독립군의 양성을 위해 무관학교를 설치하기로 결의했다. 그 결의에 따라 1911년 4월 만주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에 경학사를 세웠고, 경학사 산하에 무관학교인 신흥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성숙은 그 신흥학교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선 것이다. 성숙은 집을 떠나면서 마침 집에서 땅을 팔아 갖고 있던 큰돈을 훔쳐 품에 넣었다. 집안 어른들에게는 더없이 송구스럽고 죄송한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뒷날 집안 식구들을 만났을 때 독립군에 가담하기 위해 비상시에 사용하려고 돈을 가져갔다고 하면 용서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고향을 떠날 때는 압록강을 건너 봉천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길로 가면 만주 길을 한참이나 걸어야 했고, 중국말을 잘 못하는 것이 눈에 띄면 일본경찰의 의심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길을 바꿨다. 그래서 평양을 거쳐 원산으로 가서 청진과 두만강으로 이어지는 길을 선택했다. 그렇게 해서 두만강을 건너면 짧은 시간에 봉천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길을 잡았고 함경도 원산까지 탈없이 도착했는데, 그만 원산에서 청진으로 가는 기차를 타려다가 발이 묶이고 말았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일단 봉천행을 포기하고 지금 이렇게 낯선 스님을 따라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로 가고 있는 것이다. 원산에서 스님을 따라 서울로 오는 동안 성숙은 원산에서 스님을 따라 나서기까지 있었던 지난날을 생각하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옆자리에서 눈을 감은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성숙을 지켜보던 스님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만을 지을 뿐, 아무런 말없이 성숙이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렸다.

서울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양평으로 가는 차편을 구하지 못해 걷기로 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운 좋게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지 못하면 걸을 수밖에 없었다. 성숙은 스님을 따라 서울에서 양평까지 100리 길을 넘게 걸었다. 지친 기색도 없이 앞서 걷는 스님을 따라 양평까지, 그리고 양평에서 또다시 용문산 용문사까지 걷고 또 걸었다.

원산에서 이른 아침에 출발했는데도, 걷는 길이 만만치 않았던 까닭에 이미 해는 넘어갔고 짙은 어둠이 내린 후에야 겨우 용문사에 도착했다. 산중 사찰에서 1년 중에 가장 바쁜 날인 부처님오신날을 보낸 뒤라서 절은 한가롭고 조용했다. 우선 허기진 배를 채우고 스님이 일러준 대로 대중방에 들어가 자리에 누웠다. 방에는 네다섯 명의 스님이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 틈에 누우니 자신을 원산에 잡아두었던 여관 주인의 눈을 피해 원산 서강사를 빠져 나와 스님을 만나고 이곳 용문사까지 오게 된 하루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오랜만에 단잠을 이루고 아침에 일어나 문 밖을 보니, 절 앞마당엔 커다란 은행나무가 한 그루 서있고, 저 멀리 이어지는 산세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나니, 어제 여기까지 데리고 온 스님이 불러 앉혔다. 그리고는 “네 말대로 중을 시켜줄 테니 오늘부터 절에서 하는 일을 배워라”하고는 새벽 3시에 일어나 밤 9시 잠들기 전까지 해야할 일을 조목조목 알려주었다.

성숙은 그날부터 근 여섯 달 동안 절에서 지켜야 할 예절을 비롯해 사찰의례를배우고 스님이 되기 위한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1916년 12월 3일. 풍곡신원 스님을 은사로 조선선종갑찰대본산 경기도 광주군 수도산 봉은사에서 득도식을 갖고, 출가승려임을 인정하는 도첩을 받았다. 이로써 본격적으로 스님이 되는 공부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sjs88@beopbo.com 


888호 [2007-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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