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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백선엽 가담한 간도특설대, 항일무장세력·민간인 172명 살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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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조회수 :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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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3
[서울=뉴시스] 박대로 기자 = 고 백선엽 장군이 일제강점기 당시 간도특설대에 가담해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는 이유로 친일 행적 논란이 일고 있다.
옮겨간 뒤라며 실제로 백 장군이 독립군을 토벌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에 진보진영은 백 장군이 간도특설대의 독립군 토벌 이력과 부대 성격을 알고도 가담한 것은 더 큰 잘못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투쟁을 진압하기 위해 만주국과 일본 당국이 설립한 부대다. "조선인 독립군은 조선인으로 잡아야 한다"는 일제의 이이제이 전략에 따라 설립됐다. 부대장은 일본인이었지만 그 외 장교들은 조선인들이 많았고 병사들 역시 전원 친일 조선인 으로 구성됐다. 1기생 모집인원은 228명이었다. 지원조건은 만 18세 이상 20세 미만 간도성 내 거주 조선인 남성 중 보통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과 일본어가 통하는 자였다. 복무연한은 3년이었다.
항일조직이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설 목적에 맞게 간도특설대는 항일, 항만주국 세력에 대한 토벌을 수행했다. 연변지역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 부대인 동북항일연군이 주 타격대상이었다. 열하성, 하북성 등지까지 활동반경이 넓어지면서 팔로군(일본군과 싸운 중국공산당의 주력부대)과의 교전도 이뤄졌다.
간도에 있던 많은 조선인이 체포되거나 강간, 약탈, 고문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친일파로 인식되고 있다. 친일인명사전은 일본군 소좌 이상만 등재해놓고 있지만, 간도특설대의 경우 그 활동이 특히 악랄해 대위 이하 장교는 물론 사병까지 전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달리 간도특설대는 사병, 장교 가릴 것 없이 이 부대에 소속됐다는 것 자체가 명백한 자발적 친일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안고 우리는 나섰다. 나도 나섰다. 건군은 짧아도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대화혼(大和魂)은 우리를 고무한다.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다.
국군 지도부로 편입됐다. 특히 간도특설대 출신들은 게릴라전 경험을 바탕으로 제주 4·3사건 등에서 토벌부대 지휘관으로 참여했다. 백야전사령부를 창설해 지리산 빨치산을 토벌하고 육군참모총장이 된 백선엽이 대표적이다.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들이 역으로 게릴라가 돼 싸웠으면 독립이 빨라졌으리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라고 회고했다. 창설하려는 데는 어떤 특별한 정치적인 목적이 있지 않은가 생각하면서도 자신은 단지 하급 간부 요원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한 처지라 내게 부여되는 임무를 완수하는 데만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했다"고 되돌아봤다.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행위자다. 창군 원로이자 친일 반민족행위자인 백선엽이 현충원에 안장되면 6명으로 늘어난다.
신현준은 일본이 만주국을 수립하면서 세운 장교 양성 기관인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우리 항일조직을 소탕하는 부대인 간도특설대 장교로 활동했다. 해방 후 귀국해 해병대 창설을 주도해 초대 해병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광복 후 국군 해군 중위로 임관해 해군통제부 참모장과 방위사령관 등을 지냈다. 제2대 해병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재향군인회 부회장과 성우회 부회장을 지냈다. 김백일은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으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복무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진압했다. 광복 후 국방경비사관학교 교장, 육군보병학교 교장, 제1군단장 등을 역임했다.
5·16 쿠데타 후 한국국방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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