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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
관리자
조회수 : 1991   |   2019-04-16


생몰연도 : 1878 ~ 1938

 

훈격 대한민국장 (1962)

 

공적개요

 

- 1907년 신민회 조직, 대성학교 설립

- 1912년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 회장, 1913년 흥사단 조직

- 1919년 임시정부 국무총리서리 겸 내무총장

-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공적상세

도산 안창호는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江西郡 草里面 七里) 봉상도(鳳翔島, 일명 도롱섬)에서 아버지 순흥 안씨 흥국(興國)과 어머니 제남 황씨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도산(島山), 필명은 산옹(山翁)·섬메·신도생(新島生)이며 이명은 안광택(安廣宅), 안창호(晏彰昊)이다. 1885년에 강서에서 평양 대동강변 국수당으로 이사했으며 이듬해인 8세 때에 부친이 별세하는 바람에 할아버지 슬하에서 교육받았다. 1891년에 평남 남부산면 노남리로 이사한 이후 ‘노남리댁 셋째’라고 불리었고 마을 유림인 김현진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어린 시절 도산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이는 도산보다 서너살 연상인 필대은(畢大殷)이었다. 1894년 16세의 청년 도산은 평양에서 벌어지는 청일전쟁을 목격하며 큰 충격을 받았다. 오랜 역사와 전통의 도시 평양이 파괴되고 전란을 피해 피난하는 주민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 땅이 청일간의 전쟁터가 됨은 우리에게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자각하게 되었다. 청일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나 세상 구경에 나선 도산은 서울 정동거리에서 무료로 공부를 가르쳐준다면서 학생을 모집하는 선교사 밀러(Frederick Scheiblim Miller, 閔老雅) 선교사를 만났다. 그의 권유를 받아 밀러학당, 곧 구세학당(救世學堂, 언더우드학당) 보통부에 입학해서 신교육을 통해 서양의 학문을 익히고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밀러학당에서의 3년간의 수학시절은 도산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크게 넓혀주었다. 1896년 18세 되던 해에 구세학당 보통부를 졸업하고 조교를 맡아 학생을 지도하였다. 그해 할아버지의 부름을 받아 고향에 갔다가 마을의 서당 선생인 이석관의 딸인 13세의 이혜련과 정혼을 약속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는 혼약을 거부했으나 이혜련에게 기독교도로 개종하고 신학문을 배우게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으며 이석관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약혼이 성사되었다.

이후 독립협회에 가입한 도산은 귀향하여 필대은과 함께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설립해 민권운동에 뛰어들었다. 독립협회 관서지회 활동을 통해 사회와 민족에 대한 소명의식을 갖게 된 도산은 국민교육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질풍과 같이 몰아치는 열강들의 한국침투를 세계사의 거부할 수 없는 흐름으로 인식한 도산은 그 안에서 대한제국이 나아갈 길을 냉철히 구하였다. 평양의 쾌재정(快哉亭)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무능한 관료들을 비판한 연설로 주목받은 이후 가는 곳마다 많은 청중들을 웅변으로 감동시켰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을 받아 해체되자, 고향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漸進學校)와 탄포리에 교회를 설립해 교육과 전교활동에 전념하였다. 교육에 종사하면서 교육자의 자질에 부족함을 느낀 도산은 교육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자 미국 유학을 결심하였다. 1902년 9월 3일 밀러선교사의 주례로 제중원에서 이혜련과 결혼식을 올리고 그 이튿날 도산 부부는 함께 인천항을 출발해 유학길에 올랐다.

도산 부부는 긴 항해 끝에 하와이, 캐나다 밴쿠버, 시애틀을 경유하여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미국 유학을 오기까지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았으나 미국에 도착한 도산 부부는 거의 빈털터리였다. 그러다가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한국에서 의료선교를 한 알렉산드로 드류(Alessandro Damer Drew.1859~1926, 柳大模) 선교사를 만나 그의 집에서 집사 일을 보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우선 영어를 익히기 위해 소학교에서 공부하고자 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번번이 입학을 거절당하다가 다행히 한 학교장의 배려로 입학허락을 받고 영어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도산을 사로잡은 일은 샌프란시스코 한인들이었다. 당시 신흥도시 샌프란시스코에는 한인학생과 노동자, 그리고 인삼상인 등이 모여 있었으나 커뮤니티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으며 구심점 없이 흩어져 되는대로 살고 있는 처지였다. 앞서 이주해온 일본인 노동자들에 비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였으며 생활 또한 불안정하였다. 어느 날 한인 인삼장수들이 상권(商圈) 다툼을 벌이며 길거리에서 서로 상투를 붙잡고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도산은 같은 민족으로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남의 나라에 와서 천대받지 않고 상호 권익을 보호하면서도 신용있는 문명인으로 대접받기 위해서 반드시 한인들의 모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이 미치자 자신의 공부를 중단하고 뜻있는 동지들과 함께 미주 한인들의 최초의 조직인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친목회를 통해 한인노동자들에게 일거리를 주선하고 그들이 정당한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였다. 당시 친목회 회원들은 중국인 예배당을 빌려 예배를 보면서 친목을 도모하였고 여성으로는 이혜련과 장경의 부인만이 예배에 참여하였다.

1904년 3월 일자리를 찾아 리버사이드로 모여드는 한인들과 함께 리버사이드로 이주한 도산은 파차파 캠프(Pachapa Camp, 1532 Pachapa Ave.)를 이루었다. 도산은 한인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오렌지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오렌지 한 개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임을 깨우치려 했던 도산의 마음을 한인사회는 공유하게 되었다. 한인공동체의 변화를 지켜 본 집주인 럼지(Cornelius Earle Rumsey)는 한인들의 지도자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며 만나보기를 청하였다. 나이 든 원로가 한인공동체의 지도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럼지는 막상 젊은 도산이 한인사회를 이끄는 지도자임을 알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한인들에게 깊은 신뢰를 보이며 매년 1개월의 집세를 깎아주고 한인회관을 무료로 제공해 주었다고 한다. 나무에 손상을 주지 않으며 정성스럽게 오렌지를 거둔 정성과 주변을 깨끗이 가꾸어 나간 성실함은 한인에 대한 새로이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고 한인에 대한 신뢰와 신용으로 발전해 나갔다. 교민들은 리버사이드 한인공동체를 ‘도산의 공화국’이라 불렀다. 한편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이민 왔다가 북미로 건너온 이들 중에는 자리 잡지 못하고 떠돌며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빈번이 일어나자 도산은 가족을 리버사이드에 남겨놓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한인을 위한 노동소개소를 개설하였다. 직업을 알선하고 농장주들과 임금을 협상해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주선하며 한인의 권익을 위해 일하고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을 불어넣어주는 계몽운동도 전개하였다. 이 때 고국에서는 일제가 우리 땅에서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대한제국에 한일의정서를 강요하며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위기에 처한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던 중 1905년 3월 28일, 장남 필립(必立)이 태어났다. 필립이라는 이름은 조국을 반드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도산의 의지를 표한 것이다.

한인사회가 자리잡아 가면서 자신감을 얻은 도산과 동지들은 4월 5일, 조국 광복을 사업목표로 한 정치단체인 공립협회를 창립하였다. 이 때 28세로 초대 회장에 취임한 도산은 공립협회 회관을 마련하고 『공립신보(共立新報)』을 발간하였으며, 각지에 지방회를 만들어 공립협회를 지도하였다. 도산과 공립협회원들은 조국의 정황을 예의주시하면서 국내 및 일본 유학생들과도 교류하며 북미 각지에 지방회 조직을 확산시켜 나갔다. 일제가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을 늑결하고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소식을 들은 도산과 동지들은 1907년 1월, 리버사이드에서 대한인신민회를 결성하였다. 리버사이드에서 대한인신민회를 결성하고 그 설립 취지서를 안고 1907년 2월 20일에 국내로 귀국하였다. 대한인신민회는“우리 한국의 부패한 사상과 습관을 혁신하고 국민을 유신하고자 하며, 쇠퇴한 교육과 산업을 개량하고 사업을 유신하게 하여 새로워진 국민이 통일연합, 새로운 자유 문명국을 성립하게 한다”는 목표 아래 이를 지지하는 인물들을 회원으로 확보해 국내에서 비밀결사 신민회를 출범시켰다. 이 무렵 일본인 대륙낭인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가 도산이 4월경 서울·대구·원산 등지로 유세하고 다닌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한국통감부에 보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귀국하자마자 신민회 조직 결성을 위해 동분서주한 것을 알 수 있다.

1907년 5월, 미주 공립협회 제3대 회장으로 선출된 도산은 미주와 한국에서 구국운동 사업의 전권을 부여받고 공립협회와 신민회의 언론활동과 교육진흥, 실업진흥 등 여러 가지 구국사업을 연대해서 전개해 나갔다. 우리 민족이 자유문명국의 신민(新民), 즉 새로운 국민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각 개인의 내면의 자기 혁신이 필요하다고 보았던 도산은 근대국민국가 건설운동에 전념하였다. 서북학회 등의 표면 활동과 함께 평양 대성학교와 태극서관, 마산동 도자기회사 등을 설립해 교육 및 산업진흥운동을 전개하고 가옥 개량과 모범농장 건설과 여성교육의 필요성 제창, 국가(國歌) 보급운동 등 다양한 국민운동과 비밀결사 신민회를 통해 국권회복을 위한 준비를 전개했지만 열강 사이에서 한국이 처한 정세는 더욱 불리해져만 갔다. 이 때 도산은 서울 삼선평에서 열린 민중연설회에서 장래 다른 나라와 전쟁을 치룰 준비를 해야 한다고 연설한 바 있다.

한국을 식민통치하기로 예정한 일제는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제하며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날 해산 군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일본군과 일대 시가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해산군인들의 탄환이 떨어지자 일본군들은 반격에 나서 도망하는 해산군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하였다. 이 때 도산은 남대문 세브란스병원 의사로 복무 중이었던 김필순의 집인 세브란스 건너편에 있는 김형제상회 2층에 머물고 있다가 시가전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도산은 현장에 뛰어들어 거리에 쓰러진 군인들의 시체를 거두고 중상 입은 군인들을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 연 이틀 밤을 꼬박 새며 구호하였다. 이 경험은 한국의 근대화를 도와주겠다며 한국의 정치를 장악한 일제의 본질을 확실하게 깨닫게 해 주었으며, 후일 도산이 상해에서 대한적십자사를 재건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사건이었다. 그 해 11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도산과의 회견을 요청, 만남이 이루어진 자리에서 도산에게 ‘청년내각’ 구성을 제안하며 회유했지만 도산은 단호히 이토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국내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국민운동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여전히 도산은 미주 공립협회 회장의 자리를 유지하면서 공립협회의 민족운동을 원격 지도하고 있었다. 도산과 신민회 회원들은 공립협회와 함께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해 항일투쟁할 것을 준비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당시 공립협회는 아세아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해 미주 한인들이 투자한 주금으로 북만주 밀산 지역 봉밀산의 토지를 사들이고 이미 개척 사업을 준비 중에 있었다. 1909년 2월 3일 융희황제가 서도순행 중 대한제국 국기와 일장기를 함께 들고 나와 환영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을 때, 도산은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대한제국 황제를 환영하는데 일장기를 들고나갈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해 일제의 따가운 주목을 받았다. 한편 1909년 8월, 신민회의 청년조직으로서 청년학우회를 창립한 도산은 이 땅의 건전한 청년들을 교육계와 경제계, 그리고 정치계 등 각 계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인재로 키우고자 하였다. 청년학우회는 얼마 활동하지 못하고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강제 병합과 함께 신민회 해체와 함께 청년학우회 또한 결사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이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안의사의 행적을 추적하던 일제는 블라디보스톡 대동공보사에서 의거를 모의한 증거를 포착하고 『대동공보』의 주필 이강을 포함한 공립협회 파견 원동위원들이 간여되어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공립협회의 지도자인 도산을 안중근의거 배후 혐의로 체포하였다. 그 해 말 석방되었다가 이듬해 초에 재소환되는 등 일제의 요주의 경계 인물로 부각된 상황에서 도산과 신민회 회원들은 국내에서 더 이상의 국권회복운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신민회는 1910년 3월, 긴급 간부회의를 개최해 독립전쟁론을 최고의 구국전략으로 채택하였다. 그것은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개척하여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사관을 양성해 일제에 장기적으로 항쟁한다는 전략이었다. 도산은 1910년 4월 7일 행주를 출발해 인천을 경유하여 황해도 장연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중국인 소금상선을 타고 중국의 웨이하이웨이(威海衛)로 탈출하였다. 망명 전에 지은 「거국가(去國歌)」는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1910. 5.12일자)에 소개된 후 국외 동포사회로 급속히 퍼져 만주 및 미주 등지에서 발간된 『애국창가집』에 실려 국내외 민족사립학교에서 애창되었다. 조선총독부는 「거국가」가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일본제국에 반항을 장려한다고 지목해 이를 부르지 못하게 탄압하였다.

도산이 신민회 활동을 하던 중에 미주의 공립협회는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통합해 1909년 ‘국민회’로 통합되었다. 1908년 3월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스티븐스(D.W. Stevens)를 처단한 전명운·장인환 의거가 일어난 일을 계기로 국민회는 또 다른 북미단체인 대동보국회와 통합해 1910년 5월 10일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하였다. 「대한인국민회 헌장」에 “교육과 실업이 진발하여 자유와 평등을 제창하여 동포의 영예를 증진케 하며 조국의 독립을 광복케 함”을 목표로 했듯이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는 광무황제 퇴위 후 즉위한 융희황제를 일제에 투항한 군주로 간주하고 해외 한인 최초로 국민국가 수립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해외동포사회의 민족문제를 통괄할 수 있는 정부로서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발족시켰다. 대한제국 멸망을 내외에 공식화하고 대한인국민회가 대한제국을 대신해 국내·외를 막론한 한인 최초의 국민국가에 바탕한 임시정부임을 선언한 것이다. 대한인국민회는 중앙총회와 북미, 하와이, 시베리아, 만주 등 4개 처의 지방총회를 두고 지방총회 산하에 멕시코, 쿠바 지역을 포함한 총 116개 처에 지방회를 둔 거대 조직이었으며 민주주의 삼권분립원칙에 따라 조직을 운영하였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국외로 탈출한 도산과 신민회 동지들은 중국 칭따오(靑島)에 모여 향후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강제 병합 소식을 들었다. 도산은 근 1년간 러시아 연해주에 머물며 재러한인사회를 순행하면서 동포들이 단결을 호소하고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전력을 쏟았다. 새로 부임한 연흑룡주 총독인 곤닷찌(N. L. Gondatti)를 상대로 한인들의 권한을 보장받기 위한 여러 가지 교섭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11년 2월경, 도산은 북만주 밀산의 개척지와 안중근 가족이 거주하는 목릉을 돌아본 후 치타, 이르크츠크, 페테르스부르그를 거쳐 베를린, 런던을 경유해 그 해 9월 2일에 미국 뉴욕으로 돌아왔다. 미국에 돌아온 도산은 분주히 한인사회를 돌아보며 한인들의 정황을 파악하고 현시점에서 한인사회를 어떻게 지도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각 지방회 및 지방총회의 상위조직인 중앙총회를 두었다. 중앙총회는 “대한국민 모두를 대표하는 공법상에서 허용한바 임시정부의 자격을 모방한” 삼권 분립과 납세의무를 부과할 수 있는 ‘준정부’라고 규정한 바 있다. 도산은 1912년 1월, 동지들과 함께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창립하여 한인들의 경제적 실력을 키우고자 힘썼다. 7월에 둘째 아들 필선이 태어났으며 도산의 열성으로 대한인국민회는 활기를 띠었다. 11월 8일부터 개최된 대한인국민회 중앙대의회에서 도산이 만주지방총회 대표대리의 자격으로 참여한 가운데 중앙총회 결성 선포문을 채택하였으며 민주국가 헌법에 버금가는 전문 76개조의 대한인국민회 헌장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11월 20일에 중앙총회가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이제 재미한인들을 일본인으로 취급하려드는 일본정부에 대항해 캘리포니아 주정부를 상대로 한인들 문제에 대한 자문에 응했으며, 미국에 새로 들어오는 한인들을 위해 출입국 관계를 보증하는 준정부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렇게 중앙총회 산하에 하와이·북미·만주·시베리아 등지에 지방총회를 두었고 각 지방총회 아래에 하부조직으로 둔 지방회는 멕시코와 쿠바, 필리핀 등지에까지 조직을 두어 명실상부한 한인조직의 네트워크가 구축되었다.

한편 1913년 5월 13일, 8도 대표를 선정해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을 지도해 나갈 수 있는 중견 인물을 배출하기 위한 동맹수련단체로서 흥사단이 출범하였다. 흥사단은 무실역행·충의용감·건전인격·단결훈련·국민개업(國民皆業) 등을 목표로 한 동맹수련단체로,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적 재정후원과 일꾼양성을 통해 민족독립의 사명을 완수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국 내에 한인 교민들의 사회 활동, 권익 보호, 언론 활동, 교민 사회 단결과 사회 활동 등을 적극 지원하였다. 흥사단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여러 곳과 하와이, 필라델피아, 멕시코 등지로 지부가 확산되었다. 도산의 흥사단 단원 번호는 제 4번이다.

도산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민들을 조직으로 결집시켜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으며 특유의 친화력과 솔선수범하는 실천력과 규범에 의거한 공정하고 통합적인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주적으로 조직을 이끌었다. 이 점은 그가 참여한 조직들이 단단한 조직력을 가지고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전 세계의 한인사회를 조직적으로 통일해 독립투쟁을 지도하고 국민국가 건설의 비전을 심어주고 실현해 가고자 했던 도산의 노력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난관에 봉착되고 말았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러시아와 동맹국으로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만주 및 러시아를 무대로 한 독립운동계는 큰 타격을 받았다. 이런 와중에 1915년 1월 16일 맏딸 수산(繡山)이 태어났다. 1915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회장의 중임을 맡아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따른 국제사회의 변화를 지켜보며 한인사회를 통일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1916년 하와이의 이승만과 박용만 사이에 분규가 일어났을 때, 분쟁해결을 위해 하와이를 방문하던 차에 하와이 각 섬의 교민사회를 두루 돌아보고 돌아왔다. 1917년 5월 27일에는 둘째딸 수라(秀羅)가 탄생하였고 10월에는 멕시코 순방길에 올랐다. 멕시코 한인노동자들이 악조건의 노동계약으로 인해 수난을 겪자, 도산은 10개간의 짧은 방문기간 동안 농장주들과 새로운 계약 체결을 주도하고 한인회관 건축, 국어학교 설립, 자치를 위한 경찰서 조직, 실업회사 설립 등 많은 일을 주선해 멕시코 한인사회를 크게 변화시키고 돌아왔다. 제1차 세계대전 종결되자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신속히 대처하고자 하였다. 1917년 10월 뉴욕 약소국동맹회의에 박용만을 대표로 파견하여 한국의 식민지 현실을 호소하였다. 한편 1918년 12월 1일에 ‘재미한인전체대표자회의’를 소집해 파리강화회의 파견 대표 선출과 회의 참가를 준비하며 이승만·민찬호·정한경 3인을 한국대표로 선정했으나 미국정부가 비자 발급을 거부해 이들의 파리행은 좌절되었다. 그래서 대한인국민회는 상해 신한청년당에서 대표를 파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3,500달러의 경비를 보내 대표단의 외교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1919년 3.1운동 소식이 미국에 전달되자 3월 13일에 대한인국민회는 긴급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도산은 ‘삼일운동을 계승하자’라는 연설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민족자결주의의 공포, 그리고 파리평화회의 개최와 같은 외부적 요인보다 민족의 실력을 보여준 3.1운동이야말로 훨씬 중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선포하였다. 민족의 역량 성숙과 함께 독립의 기회가 도래했음을 힘주어 강조하며 발 빠르게 전 동포사회를 추동해 독립운동의 길로 함께 나갈 것을 독려하며 독립전쟁 준비를 위해 재외 동포들이 단결할 것과 재정공급과 선전활동에 주력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한편 미국의 윌슨 대통령과 영국·프랑스·이탈리아·중국 등 5개국 대사에게도 편지를 보내 한국대표(김규식)의 출석권을 허락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특히 여성들도 독립운동에 책임을 갖고 나서야 한다며 각지에 산재한 여성단체들의 통합을 권유하였다. 1919년 8월 북미의 5개 여성단체가 다뉴바에서 대한여자애국단으로 새로이 출범하게 되었다.

한편 3월 24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도산을 중국에 파견하기를 결의하였다. 도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기 위해 5월 25일에 상하이에 도착해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하였다. 임시정부의 체계를 갖추고 조직적으로 사업을 전개해 나가고자 힘썼다. 우선 정부에는 국민이 있어야 하므로 먼저 인구조사에 착수하였고 정부가 운영되려면 재정 확보가 우선되어야 했기에 국채 발행을 비롯해 인두세 징수, 구국재정단 조직 등 여러 재정 확보책을 고민하였다. 한편 1919년 7월에 한국 역사 자료를 수집하고 역사를 편찬하고자 임시사료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도산이 총재로 취임하여 편찬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9월 23일에 『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 4편 4책의 1백질이 발간되었다. 이는 국제연맹회의에 선전 자료로 제출하고자 하는 우선의 목적을 가졌지만 한일간의 근대 역사를 새로이 정리하여 국민의 독립의식을 고양시키는 교육 자료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또한 연통제를 실시하고 교통국을 설치해 정부의 국민적 기반을 구축하고 임시정부의 연락과 교통망을 갖추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간도 등지에 특파원을 파견해 만주의 독립군을 임시정부 산하로 통합하고자 교섭하였다. 그 외에도 대한적십자회 재건, 재상해 교민학교인 인성학교의 공립학교 출범,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1919년 8월 21일 창간) 발행 등의 사업이 진행되는데 도산의 역할이 컸다.

한편 러시아 블라디보스톡과 상하이·한성 등지에서 각각 수립된 임시정부의 통합을 주도한 이도 도산이다. 블라디보스톡 대한국민의회정부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여러 차례 통합논의를 거쳐서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정부의 위치는 상하이에 둔다고 하는 원칙에 합의하고 1919년 9월 11일, 마침내 통합을 이루었다. 통일정부 내각에서 도산은 한성정부의 직책에 따라 노동국총판(勞動局總辦)에 임명되었는데, 총판은 장관급이 아닌 국장급의 직책이라 상하이 임시정부의 소장 세력 중에는 노동국을 노동부로 격상하고 직함도 총판이 아닌 총장으로 개조하자고 하는 주장도 있었으나 끝내 도산은 사양하였다. 통일 임시정부의 각료진 중에는 대통령을 비롯해 국무총리 등도 아직까지 상하이로 부임하지 않는 각료진이 많은 가운데 도산은 1920년을 새로이 맞이한 석상에서 도산은 일제를 향해 ‘독립전쟁’을 선포하였다. 

도산은 1월 1일 임시정부 신년축하회 석상에서 ‘우리 국민이 결단코 실행할 6대사’라는 연설을 통해 군사·외교·교육·사법·재정·통일의 6대사업의 구체적 진행방법과 실행을 제시하며 한민족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통일’임을 거듭 강조하였다. 국내외의 국민들은 독립전쟁이 일어나면 모든 이들은 병역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국민개병(國民皆兵)과 임시정부에 인두세를 내어 조세의무를 지켜야 한다는 국민개납(國民皆納), 직업을 갖고 생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국민개업(國民皆業)의 방침을 발표하고 국민은 정부의 주인이므로 책임감을 갖고 정부를 유지하는 데 기반이 되어 주어야 하며 전 민족이 독립전쟁에 나설 것을 호소했다. 1920년에 제2의 3.1운동을 일으켜 국제사회에 한국민의 독립의지를 알리고자 하였다. 또한 서간도 일대의 독립군 단체를 임시정부 산하의 군대로 재편하고자 3월에 대한독립청년단의 부설 의용대를 대한광복단으로 개편하였고 6월에 대한광복군총영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한편 도산은 임시정부에 해군비행대를 창설해 선전활동에 비행기를 도입하고자 하였다. 비행대의 설치는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과 미주의 흥사단원 김종림의 노력으로 미국 캘리포니아 글렌카운티 윌로우스에 비행사양성소의 건립으로 실행되었다. 비행사양성소는 표면적으로 비행사 양성 학교였지만 실제로는 임시정부의 공군사단이었다. 정부 통합 전에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서 수행해왔던 사업의 연장선상에서 도산은 연통제 시행과 선전원 파견 등 사업에 계속 관여하게 되자 도산을 ‘지방열의 화신’이니 ‘야심가’이니 하는 비판을 받자 도산은 의욕적으로 추진해왔던 활동들을 접고 통합운동에만 전력하였다. 정부 통합을 전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개 독립운동 단체가 아닌 그야말로 ‘정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동시에 정부에 생명을 불어넣어주기까지 도산의 기여는 절대적이었다.

도산의 통일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위임통치안에 의해 결집된 반정부세력은 이승만의 외교노선에 반대하며 반정부활동을 전개해 임시정부의 지도력에 큰 타격을 입혔다. 현재의 정부조직이 미주·러시아·만주 등 각각의 운동조건이 다른 곳으로부터 모여든 독립운동의 세력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현실에 직면하자 도산은 그 대안으로 독립운동 세력을 횡적으로 연대시킨 대독립당을 결성해 정부와는 별개로 정당에 의한 독립운동을 지도하고자 하였다. 1921년에 들어와 위기에 처한 임시정부 독립운동 방략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도산은 여운형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국민대표회의기성회를 조직해 나갔다. 1923년 1월 3일에 시작된 국민대표회의는 국내는 물론 미주, 만주, 중국관내, 러시아 등지에서 대표권을 인정받은 140명이상의 대표들이 참석한 대대적인 민족회의였다. 여기서 도산은 부의장에 선임되었고 외교분과위원과 헌법기초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국민대표회의는 5월 15일까지 총 63회에 걸쳐 회의가 진행되었지만 정부유지파와 새로운 정부 구성을 주창한 창조파, 그리고 정부개조를 주창한 개조파로 나뉘어 그 어떤 합의도 끌어내지 못하였다. 도산은 현정부유지파와 창조파를 중재하며 중도안으로 정부개조안을 주창했지만 국민대표회의는 끝내 결렬되고 말았고 실망한 독립운동 세력들은 상해를 떠나 버렸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도산은 결코 좌절하지 않고 또다시 대독립당 결성과 이상촌건설운동에 매진하였다. 북중국의 산해관·금주(錦洲)·호려도(葫蘆島), 길림 경박호 부근을 직접 답사하며 이상촌건설 후보지를 둘러보았으며 만주의 군벌들과 비적들의 창궐로 한인의 이상촌 건설은 쉽지 않았다. 일단 남경에 1,500평의 토지를 구입해 이 곳에 동명학원을 설립하고 국가건설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으로 일단 출범하였다.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과 독립운동방략에 대해 재미한인들과 의논하고자 도산은 1924년 12월에 미국을 방문하였다. 방문기간 동안 흥사단과 대한인국민회 동지들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고 이상촌 건설의 지원과 임시정부에 인두세를 내 줄 것을 미주 교민들에게 호소하고 13개월간의 방문을 마치고 홍콩을 경유하여 5월경에 상하이로 돌아왔다. 도산이 미주에 체류한 동안 임시정부의 제2대 대통령으로 박은식이 선출되었다. 박은식 대통령의 재임 중에 헌법을 개정해 임시정부는 국무령제를 채택하였다. 1925년 9월에 임시정부 국무령에 이상룡이 취임했으나 임시정부와의 통합 문제로 인한 정의부 내부의 분규가 일어나자 이상룡은 급거 만주로 귀환하였고 그 후임으로 1926년 2월 양기탁이 국무령에 임명되었지만 역시 취임을 거부해 국무령자리는 공석으로 남게 되었다. 임시의정원에서는 도산이 상하이로 돌아오기 전인 5월 8일에 국무령에 임명했으나 도산은 취임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자신은 정부 내에서보다는 재야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정부를 후원하고, 독립운동계의 전선통일운동을 지원하는 것이 시세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도산은 재야에서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조직하고 재정 위기에 빠진 정부를 후원하고 각지에 한국유일독립당 준비회를 조직하여 각 지역별 독립운동 단체를 유일당체제로 통일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도산이 주장한 독립운동의 방략은 좌·우 운동세력의 통합과 전민족의 연대, 그리고 일제에 대한 파괴책이었다. 미국 내의 일부 분자들은 도산이 사회주의자이며 위험분자로 지목하며 도산을 공격했지만 이같은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1926년 7월 8일에 도산의 상하이 귀환을 환영하는 연설회 석상에서 ‘주의(主義)’를 초월해 전민족운동계가 역할분담을 한 혁명을 진행시켜 나갈 것을 간절히 호소하였다. 도산은 이념과 노선이 다양한 독립운동계에서 유일독립당 결성의 행보를 멈추지 않고 만주지역에까지 확대시켜 나갔다. 1927년 1월에 길림에 도착한 도산은 독립운동가들과 만나 유일당 결성의 당위성을 주지시켰다. 1월 27일에 길림성 동대문 밖 대동공사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조선독립운동의 과거와 현재>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이 때 들이닥친 중국경찰에 피체되어 20여일 만에 풀려난 이른바‘길림사건’을 겪었지만 석방 이후에도 만주 각지를 순회하며 대동단결을 호소하였고 4월 1일에는 길림의 교민들과 함께 농민호조사를 결성하였다. 한편 정의부·신민부·국민부 3부 대표들이 모인 이른바 ‘신안돈회의’에 직접 참여하여 만주지역 유일당 조직 결성을 위한 준비모임을 주도하였다. 불굴의 의지와 정력으로 민족통합과 대동단결을 주선해 나간 도산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26년 10월부터 1927년 9월 사이에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광저우(廣州), 우한(武漢), 난징(南京) 등지에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가 설립되었고 마침내 1927년 11월에 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연합회가 출범할 수 있었다. 도산이 유일당 운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인 1927년 9월 26일, 미국에서는 필영(必英)이 태어났다. 막내아들 필영은 태어나서 한 번도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였다. 중국인들에게 구축당하는 비참한 한인들의 실정을 돌아본 도산은 1928년에 들어와 중국인들과 항일협력전선을 결성해 공동 투쟁할 것을 역설하였으며 아울러 자신의 대공주의(大公主義)사상을 정립해 나갔다. 이해 12월 20일에 연희전문축구단이 원정 경기를 위해 상해를 방문했을 때, 도산은 학생들에게 “개인은 민족에 봉사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의무와 민족에 대한 의무를 완수 한다”는 요지의 훈화를 했는데, 이는 대공주의의 요지를 표현한 것으로 대공주의는 사회전반의 공익을 제일의로 하고 독립운동계에 분열을 초래했던 자본주의(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간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상대화하여 민족평등·정치평등·경제평등·교육평등의 사회민주주의적 국가수립의 전도를 제시하였다. 또한 주도권 쟁탈이나 일삼고 있는 좌파, 우파 모두의 독립운동계를 각성시키고 1920년대 내내 독립운동의 진행을 가로막던 고질적인 사상분열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의 사상과 노선 갈등의 극한 대립을 유화(宥和)시키고자 그 어떤 주의와 노선으로도 분파할 수 없는 자기희생의 대공주의(大公主義)라는 제3의 새로운 이념을 민족 앞에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대공주의는 정치적 분파와 이데올로기 분열에 빠진 좌파와 우파 진영 양측으로부터에서 모두 비판과 공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도산은 불굴의 의지로 각 계파 진영과의 대화를 멈추지 않고 민주주의적 민족국가 수립의 비전을 제시하며 대일본에 대해 비타협적 항일투쟁 노선을 견지하고 민족 내부에서는 민족 간의 신뢰와 사랑에 바탕을 둔 민족 우선의 통일주의를 강조하였다.

유일당 운동으로 민족 내부의 전선통일을 꾀하며 분주했던 도산은 점차 중국을 노골적으로 침략해 들어오는 일제에 대항해 한·중 공동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중국인들에게 일제 침략의 첨병으로 오해되어 무자비하게 구축당하는 재만한인들의 비참한 처지를 구할 수 있는 방도이기도 하다. 1928년 5월 도산은 중국신문인 『세계신문』과 『중앙일보』에 <중국혁명동지에게 고한다>라는 논설을 게재해 한·중 양 민족의 합작을 제의한 바 있다.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에도 중국계 신문에 한국의 혁명방략을 소개하면서 일본의 정치·경제·군사행동을 파괴해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나도록 극단의 수단까지 써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도산은 중국과 연합해 대일항전의 역량을 배가시키고자 노력하였지만 국제정세는 불리하게 전환되고 있었다. 1928년 7월의 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서는 코민테른은 민족 부르조아지와 유기적 관계 유지 방향에서 좌파 중심의 협동전선론으로 혁명 전략을 전환하였다. 좌파가 중심이 된 협동전선체 결성 움직임과 헤게모니 전취론이라는 전술의 등장은 좌우익 통합이라는 민족적 명분을 압도해 버리면서 그 간 어렵게 좌우통합의 기반을 마련하고 서로 접근해 갔던 독립운동계는 혼돈에 빠졌다. 그 결과 민족적 입장에서 유일당 운동에 참여했던 사회주의 세력의 이탈이 시작되었으며 1929년 10월 26일 좌파세력들에 의해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는 해체되었다. 1929년 3월에 남경에서 개최된 국민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에 임시정부 대표로 도산이 파견되었다. 정부 요인이 아니면서도 정부 대표로 참여할 수 있었음은 그간 정부 외곽에서 대중국과의 공동전선구축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요구했던 당사자가 도산이었기 때문이다. 본 대회에서 임시정부는 한·중 양국이 항일동맹군을 조직하면 동삼성에서 분투할 혁명군 10만을 확보할 수 있다며 중국과의 군사동맹체결을 제안하는 요구서를 국민당측에 제출했다. 이러한 제안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군사동맹을 꾀함과 동시에 분립된 독립운동계의 기선을 잡아 계속적으로 민족 내부의 유일대당운동을 추진하고자 한두 가지의 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독립운동 세력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는 좌익을 배제하고는 궁극적으로 달성하고자 한 민족통일로의 길로 결코 나갈 수 없다고 본 도산은 민족주의와 계급주의를 통합하고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독립운동 노선을 채택하고자 고심하였다. 1930년 1월 비록 대다수의 인물들이 우익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대공주의 정신을 삼균주의로 정립하여 강령에 삽입하였다. 그리고 일본제국주의를 한·중혁명의 공동의 적으로 규정한 대중국과의 항일통일전선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그리고 대일항쟁의 공동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대일전선통일통맹 결성을 추진해 나갔다. 1930년 12월 27일 고향 고일리에서는 어머니 제안 황씨가 8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1931년에 상해 한인들의 경제적 처지는 매우 불안하였다. 경제 부분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도산은 상해 한인의 소비조합을 만들고 장차 생산합작의 단계로까지 발전을 염두에 둔 경제적 혁명단체로서 공평사를 창립해 경제적 위기를 타파해 나가고자 하였다. 1932년 4월 29일에 윤봉길 의사가 일본인들의 천장절 행사장인 홍구공원에 폭탄을 투척하여 7명의 일본군과 정부 수뇌들을 일시에 쓰러뜨렸던 날, 상해 이유필의 집을 방문했다가 민단장이라고 오인된 도산은 프랑스와 일본 영사관 합동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대전감옥으로 이송되어 2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1935년 2월 10일 가출옥하였다. 허약해진 몸을 이끌고 전국을 순회했지만 일경의 감시와 방해가 심해하자 중단하고 평남 강서군 대보산에 송태산장을 손수 지어 그곳에 은거하였다.

중국 침략을 앞두고 일제는 국내 일체의 민족운동을 말살하기 위해 1937년 6월, ‘동우회사건’을 일으켰다. 일제는 “동우회가 표면으로는 수양단체를 가장하여 교묘히 당국의 취체를 면하고, 이면에서는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집요(執拗)한 운동을 계속해 왔다”며 181명의 동우회 회원들을 체포하고 독립운동의 증거를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도산과 동우회 회원들은 종로경찰서로 넘겨져 135일간 집중적으로 조사를 받고 경기도 경찰부로 이송되었다. 그 과정에서 고문으로 옥사한 이들이 생겼다. 8월 15일 예심종결을 거쳐 ‘치안유지법 위반’판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지병이 악화되어 위급상태에 빠지자 도산을 급히 병보석으로 출소시킨 일제는 1937년 12월 24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 이와이(岩井) 내과에 입원시켰다. 당시 최고 권위로 인정받던 이와이(巖井) 내과 병동에서 도산의 주치의를 맡았던 김용필 박사는 도산의 병명을 장결핵, 늑막염과 복막염 등으로 인한 합병증이 발생한 상태로 폐결핵 겸 결핵성 복막염으로 진단하였다. 도산을 수차례 문병한 백기천 박사는 여러 가지 증세로 보아 간경화증 겸 만성기관지염 및 위하수증의 증세를 보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병마를 이기지 못한 도산은 1938년 3월 10일, 0시 5분에 만 59년 4개월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도산의 서거로 인해 민중시위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일제는 장례식에 참석 인원을 제한해 소수의 인척들만 참석케 하고 묘소인 망우리 공동묘지로 가는 길목마다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해방 후 1973년에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도산공원을 조성하고 11월 10일 도산 탄신 95주년을 맞이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힌 도산의 유해와 미국에서 사망한 아내 이혜련의 유해를 이장하여 도산공원 묘지에 합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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