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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빈섬스토리②]중국공산당 영웅 한국인 정율성 "나는 김일성 좋아 안합니다"
관리자
조회수 : 2812   |   2019-05-15


[음악가 정율성] 

 

김산-김구-김일성과의 인연…베이징의 강에서 물고기를 잡다 눈감다 

 

 

# 19세 광주출신 청년, 상하이행 여객선을 타다 

이제, 정율성이 중국 연안으로 가기 전의 삶으로 돌아가본다. 1914년생. 광주에서 정해업과 최영온 사이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의 호적 이름은 정부은(鄭富恩)이었다. 부친은 광주 수피아여고 교사를 지냈고 모친의 형제들은 목사(최흥종)와 초대 전남지사(최영욱)였다. 정율성의 형제 자매는 저마다 항일독립운동을 했으나 모두 좌익으로 분류되어 한국에서 서훈을 받지는 못했다. 그는 신흥중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항일운동 조직에서 활동을 한 듯 하다.  

 

1963년 그는 '북경만보(北京晩報)'에 이런 글을 썼다. "나는 어려서 혁명선배들로부터 인터내셔널가, 라 마르세이유, 적기가를 몰래 배웠다. 이런 노래를 부를 때면 내 눈앞에는 수많은 노동대중들이 대오를 형성하여 진군하는 모습이 나타날 듯 하여 나도 모르게 목청이 높아졌다. 그러면 노래를 부르던 동지들은 나에게 눈짓을 하며 '소리를 낮춰'라고 하였다. 그때 나는 어려서 왜 이처럼 좋은 노래를 목청껏 부를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잘 몰랐다."

1933년 5월8일 정율성은 목포항에서 헤이안 마루(상하이-목포-부산-나가사키-상하이 왕래 여객선)에 올랐다. 가슴에는 만돌린이 든 가방을 안고 있었다. 셋째 형 정의은은 의열단 단원으로, 난징에 세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열단간부학교) 2기생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에 침투해 정율성을 포함 6명을 모았다. 이들을 헤이안 마루에 태워, 일제의 감시를 피하며 상하이로 가고 있다.  



    [백범 김구]



  # 의열단간부학교에 백범 김구가 찾아오다 


의열단간부학교가 생긴 것은 1932년 윤봉길의거 덕분이다. 홍커우공원 폭탄투척 이후 중국 장제스(장개석)정부는 김원봉에게 재정지원 의사를 밝힌다. 김원봉은 이 지원으로 간부학교를 설립하고 1기를 졸업시킨다. 졸업생 26명 중에는 시인 이육사와 의열단 창단멤버 석정 윤세주가 눈에 띈다. 그 다음 입교할 2기생에 정율성이 낙점된 것이다. 2기생은 모두 55명이었다.(간부학교는 3기까지 125명을 배출한다.) 

학생들은 약산 김원봉과 석정의 강의를 받았다. 김원봉은 조선정세와 의열단의 임무에 대해 가르쳤고, 윤세주는 유물사관과 각국 혁명사를 지도했다. 교육을 받던 어느 날 백범 김구가 찾아왔다. 2기생 15명을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한인특별반으로 옮겨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김구는 이날 대원들에게 태극기가 그려진 만년필 하나씩을 선물로 주었다.

2기가 졸업한 1934년, 다른 대원들은 주로 국내 침투 명령을 받았으나 정율성은 난징에 남아 전화국에 침투하여 일본인들의 전화를 도청하는 임무를 맡는다. 한편 국내에 침투한 1기생 일부가 일본경찰에 체포되면서 난징군관학교는 그 실체가 드러나기도 했다.

# 레닌그라드음악원 출신 크리노와 교수와의 해후 

우체국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그는 소련 레닌그라드음악원 출신인 크리노와교수에게 성악지도를 받게 된다. 이때 그는 자신의 이름을 '율성(律成, '선율로 성공함'이란 의미)'으로 바꾼다. 상하이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정율성은 독창을 했는데 객석의 박수가 우레와 같았다. 크리노와가 달려와 감탄하며 말했다. "어지간한 성악가도 처리할 수 없는 고음을 그렇게 잘 소화해내다니 대단한 음악적 자질이야." 

이후 크리노와는 율성에게 이탈리아 유학을 권유한다. 경비도 해결해주겠다고 했다. 음악에 끝없는 갈증을 느껴온 그로서는 얼마나 바라던 일인가. 하지만 고민 끝에 그는 사양한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 제게 소중한 것은 음악보다 나의 조국입니다. 나라 없는 음악가가 설 땅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여기서 용기와 희망을 가슴에 돋우는 그런 음악을 하겠습니다." 

 


 

 

 

[김산] 

 

# 님 웨일스 '아리랑' 주인공 김산과의 인연 

김산은 공산주의자 중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이다. 1936년 결성된 '조선민족해방동맹'은 민족적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단체였다. 계급혁명보다 민족혁명을 앞세운 이들은, 조선공산당이 중국공산당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조선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동맹 이름에도 '공산주의'란 말을 넣지 않았다.

이들이 이런 생각을 갖게된 까닭은 중국혁명 과정에서 조선인 지도부가 허망하게 괴멸되는 상황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조선독립 항쟁을 벌이지도 못한 채 다른 나라의 싸움에 끼어들어 죽어간 동지들을 잊을 수 없었다. 이 동맹을 주창한 사람은 김산, 김성숙, 박건웅이었다. 박건웅은 정율성의 매형이었다. 자연스럽게 율성은 김산과 어울리게 된다. 

# 김산 "물 속의 소금이 되는 건 싫다" 

김산은 지쳐 있었다. 청춘을 바쳤던 당이 지옥에서 살아온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상에 앉은 상층부가 죽어간 동지들의 피가 얼마나 붉은지 어떻게 아느냐고 중얼거렸다. 어느날 김산은 이런 말을 했다. "혁명을 하는 것은 좋지만, 조선혁명이 아닌 중국혁명을 위해 물 속의 소금처럼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건 허무한 일이 아닌가." 율성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 속의 소금...'이란 말을 다시 되뇌었다. 

1936년 6월 김산은 난징에 있는 한 어민의 집에서 한달간 정율성과 함께 지냈다. 현무호의 정자와 계명사 절, 명나라 고궁을 함께 다니며 시절의 비감을 함께 나눈다. 8월이 되자 김산은 연안으로 떠난다. 정율성이 중국 공산당의 '메카'가 된 연안으로 떠나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김산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연안의 항일군정대학에서 김산은 일본경제사와 화학, 물리 강의를 했다. 미국기자 님 웨일스가 김산을 취재해 '아리랑'을 쓴 것은 이 무렵이다.

이후 김산에게는 최악의 상황이 닥쳐온다. 1938년 10월 두번이나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면서 풀려난 김산이 '일본특무(간첩)'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공산당의 보안처에서 수사를 했다.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태항산 전선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는다. 이 소식을 듣고 정율성이 달려갔다.

"왜 갑자기 전선으로 가는 겁니까? 지금이라도 재심을 청구해보는 게 어떨지요."

정율성의 말에 김산은 씩 웃으며 말했다. 

"조선을 떠난 이후 나는 강철같이 살아왔어. 죽음이 두려웠다면 이 길에 뛰어들지도 않았을테지."  

이 말이 마지막이었다. 김산은 전선으로 가는 길에 은밀히 처형을 당한다.  

 


[정설송과 정율성 부부.] 

 

# 북한으로 간 정율성, 다시 중국행을 택한 까닭 

정율성은 연안에서 중국인 여학생 정설송(딩쉐쏭,丁雪松)을 만난다. 1938년 봄 연안 북문 밖, 산책 나온 항일군정대학 여학생들 사이에 그녀가 끼어있었다. 이후 정율성은 이 대학의 음악지도원이 되고, 여학생대장인 정설송을 다시 만난다. 정율성은 설송의 '요동(쪽방)' 앞에 들꽃과 함께 톨스토이 소설을 몰래 갖다 놓는다. 

1941년 그들은 결혼을 했다. 율성이 태항산으로 떠난 뒤 설송은 혼자 아기를 낳았다. 젖이 나오지 않아 남편의 바이얼린을 팔아 산양 한 마리를 샀고 그 젖을 먹여 키웠다. 바이얼린 (소제금(小提琴))을 팔아 키운 아이란 의미로 딸의 이름을 소제라 지었다.

해방이 되었다. 1945년 9월3일 정율성은 조선의용군을 따라 연안을 떠나 귀국길에 오른다. 당나귀엔 딸 소제가 탔고 말 위엔 아내 설송이 앉았다. 처음엔 대륙을 걸어서 갔고 승덕에서 기차를 타고 만주로 이동했다. 심양 인근에서 소련군이 막아섰다. 소련은 조선의용군이 부대 편제를 유지한 채 북한으로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 상황은 남쪽으로 들어오려던 임시정부 인사들의 경우와 어찌 이리 닮았는가. 

# 2개 국가 군대의 공식군가를 지은 사람은 정율성 뿐 

그가 평양에 도착했을 때는 12월이었다. 그는 중국공산당 당적을 버리고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황해도당위원회 선전부장이 된다. 북한에서의 권력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소련파가 차지했고, 연안파는 투쟁 경력을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조선인민군 협주단장이 되었고 1947년부터 1948년까지 북한 순회공연을 한다. 조선인민군 행진곡도 만들었다. 이 곡은 공식군가가 되었다. 세계 음악사에서 두 나라의 군대를 대표하는 공식군가를 만들어낸 작곡가는 정율성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율성에게 북한은 '맞지 않는 옷'과 같았을까.  어느 날 김일성이 우리 민요 가운데 '노들강변'을 가리키며 너무 구시대적이라며 민요 부르는 것을 금지한 적이 있었다. 정율성은 그에게 '노들강변이 금지곡이 되어선 안되는 이유'에 대해 한 시간이나 설득했다. 김일성은 웃음을 짓더니, 금지곡에서 제외하라고 말했다. 이런 강한 기질이 북한 체제 속에서 오래 버티기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한국전쟁 와중에 아내 정설송은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가족과 함께 중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총리는 김일성에게 정율성 일가의 귀환을 정식으로 요청했고 김일성이 받아들였다.   



[정율성 기념 음악회]

 

 

# "나는 김일성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1951년 1월 서울에 도착한 정율성은, 폐허가 된 거리에서 책 하나를 찾아낸다. '조선궁정악보'란라는 책이었다. 그는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그 책을 귀하게 안고 중국길에 올랐다. 예술을 사랑한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중국에서 그는 김일성이 방중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마중 안나갑니까? " 

옆에 있던 사람이 농담을 건넸을 때 그는 나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김일성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중국 문화혁명 시절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조선은 나를 중국사람으로 여기고 중국은 나를 조선사람으로 여긴다. 차라리 어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사냥이나 하면서 살고 싶다." 

문혁시절 타협하지 못했던 까닭에 그는 음악을 창작할 권리도 작곡한 노래를 발표할 기회도 얻지 못했다. 1976년  저우언라이와 팔로군의 전설 주더(朱德), 마오쩌둥이 잇따라 스러진 그해 12월, 베이징 인근의 운하에서 물고기 그물을 잡아당기던 정율성은 파란많은 삶을 마감한다.

이 땅이 쏘아올린 가장 아름다운 노래의 별이 떨어졌으나, 연안 보탑산 봉우리엔 여전히 노을 불타오르고 연하강 물결 위엔 달빛 무심히 흐르리라.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이, 2019년 4월 하얼빈 정율성기념관에서 정율성의 부인 정설송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사진 = 이상국 논설실장 ]



# 지난달 중순(2019년 4월), 한국언론재단 및 기자협회 지원으로 하얼빈 안중근기념관 및 정율성기념관 탐사 취재가 있었다. 하얼빈역에 있던 안중근의사기념관은 역 확장공사에 따라 이곳 하얼빈 유이로(友谊路) 233호 1층에 잠시 옮겨와 있었는데, 하얼빈역 기념관을 재개장한 뒤 철거한 상태였다. 2층은 정율성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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