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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의 훈장과 의열단 의백 김원봉의 '빨갱이' 딱지
관리자
조회수 : 2770   |   2019-05-10


김원봉 선생의 가족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빨갱이 김원봉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몰살당했다.

 

 

 

 

 


(이 기사는 지난 주의 김원봉 선생의 서훈 논쟁을 다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의 후편입니다. 지난주 전체적으로 다룬 ‘김원봉은 뼛속까지 민족주의자였다’는 기사의 보완편이기도 합니다.)
 

“1947년 1월16일 경남 통영에서 김원봉 장군의 대일 실전 조선의용대 기록영화를 상영하던 중 광복청년단원 20여명이 영화관을 습격해서 해설중이던 황용암씨를 무수히 난타한 뒤 통영경찰서에 인도했다. 경찰서는 황씨를 4일간 구금했다. 이 영화는 공보부의 검열을 받고 정식으로 허가받아 상영했는데….”  

자유신문 1947년 1월25일자 기사이다. 약산 김원봉(1898~1958)의 조선의용대 기록영화가 백색테러를 당했다는 기사다. 무슨 곡절이 있었기에 의열단 ‘의백’이자 조선의용대장이며, 광복궁 부사령이자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지낸 김원봉 선생을 공격한 것일까.




https://youtu.be/M2PPmMylp9k

 

 

■광복군, 임시정부에 합류한 김원봉  

시계를 다시 1940년대 초반으로 돌려놓고 보자.  

1938년 10월10일 결성된 김원봉 선생의 조선의용대 주력은 중국의 북부인 화베이(華北) 지방으로 이동한다.  

아무래도 조선인 대원을 확보하려면 조선인이 더 많이 거주하는 북쪽지방으로 이동하는게 유리했다. 게다가 장제스(蔣介石) 중국 국민당 주석은 또 한번 ‘내부의 적(공산당)이 문제’라면서 공산당 견제와 타도에 힘을 쏟고 대일항전에는 소극적으로 나섰다. 대일항전이 우선이었던 조선의용대의 주력은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우는 화베이의 팔로군(중국 공산당의 주력군)에 합류했다. 여기에 정통 팔로군 장군인 김무정(1905~1951)이 조선의용군에 깊이 관여하게 됐다. 그러나 김원봉 선생은 충칭(重慶)에 남아 민족혁명당을 이끌고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선생과 함께 잔류한 조선의용대원 일부는 1942년 7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됐다.




 

1947년 1월 16일 경남 통영에서 김원봉 선생의 조선의용대 기록영상물이 상영되는 순간 우익단체 청년들이 몰려와 해설자를 구타하고 필름을 빼앗았다는 내용이 실린 자유신문 기사. 당국의 허가까지 받은 영화 상영이었는데  테러를 당해 일반의 비난이 자자하다는 여론을 담고 있다.
 

 

2년 뒤인 1944년에는 한국독립당 등과 연립정부를 건립하는데 이때 민족혁명당의 김규식(1881~1950) 선생은 임정 부주석으로, 김원봉 선생은 임정 군무부장에 추대됐다. 군무부장은 지금의 국방부장관 격이다.  

선생은 국민당 지구의 항일조선인 뿐 아니라 화베이의 팔로군 지역 조선인 세력까지 아울러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한국독립당의 반대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해방 후엔 다시 측근이나 처남까지 조선의용군에 보내 연계를 시도했지만 모두 여의치 않았다. 
 

■2진으로 환국해서 4인자로 서열추락  

1945년 해방이 되자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환국한다. 그런데 여기서 갈등이 생겼다. 

임시정부 요인들을 태울 미군 수송기의 정원은 15명이었다. 이 15명에 들기 위한 각 계파간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선생은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등이 탄 1진 대열(11월23일 환국)을 양보하고 2진(12월2일)으로 환국했다. 이것은 해방정국의 권력서열에서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1진으로 환국한 김구 주석 등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김원봉 선생은 김구·이승만·김규식 등에 이어 4인자로 소개됐다.  

선생은 일관되게 주요 정치세력들과의 연대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른바 좌우합작을 향한 의지였다.  

하지만 1946년 1월 열린 임시정부의 비상국민회의 주비회가 우익 편향으로 기울자 김원봉 선생 같은 좌파 민족주의자들이 설자리를 잃었다. 선생은 결국 비상국민회의에서 탈퇴하고 말았다.



노덕술은 해방 후에도 미군정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으로 부활한 뒤 장택상 암살미수로 붙잡힌 용의자를 고문 치사시킨 뒤 한강에 유기한 사건으로 악명을 떨쳤다. 하지만 그때도 끄떡없이 살아남았다. 경향신문 1948년 7월27일자


 

 

 

 

 

그것은 1942년 충칭에서 성립된 임시정부를 매개로 한 다양한 단체의 협동전선은 붕괴되었고, 김구와 김원봉 간의 애증이 섞인 연대도 종막을 고했다.  

미군정청의 전사편수관이었던 리처드 로빈슨은 당시를 이렇게 설명한다. 

“1946년 2월1일 즈음 김구의 임시정부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진보적 분자들이 떠났다. 김규식과 김원봉이 김구의 지도권을 벗어나 그들의 당파를 구성하여 주도했다.”
 

■왼편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그러나 지금도 그런 편이지만 해방정국이 어떤 때인가. 우익과 좌익, 남한과 북한, 미국과 소련 등 대결구도에서 하나만 골라야 한다는 이분법 진영논리가 팽배했던 시절이었다. 우경화한 임시정부에서 벗어난 이른바 좌파 민족주의자는 왼편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다. 좌파 민족주의자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좁았다.  

“김원봉은 우익과 좌익 사이에서 화해를 주선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실패하자…확실히 한 개인에 대한 위협은 그를 공산주의 노선에 있도록 했다. 그의 이름은 공산주의자들에게 가치있는 자산이 됐다”(리처드 로빈슨)  

임정을 탈퇴한 임정 군무부장이자 광복군 부사령 출신의 좌파 민족주의자는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 결성에 합류했다. 하지만 민전 내에서도 조선공산당 등 좌익세력에 매몰되지 않았다. 선생은 독자적인 정치생존의 길을 도모하고자 했다. 김원봉은 민전에 참여하면서 “새 조선을 건설할 의무는 우리의 우군인 미·소 뿐 아니라 우리의 혁명전사와 우리 민중에게 있다”고 천명했다. 

 



 

 

1949년 3월28일은 반민특위에 체포된 노덕술 등 친일파의 첫공판일이었다. 이 사실을 전한 경향신문은 ‘민족반역자 재판의 날, 태극기는 봄빛을 맞아 빛나고 하늘도 땅도 사람도 명랑했다’는 제목을 달았다. 경향신문 1949년 3월 29일자 신문이다. 


 

“민주주의는 독선이 아니며…남북일체를 규합하여 속히 임시국회를 열어 강력한 우리의 통일정부를 수립하도록 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리처드 로빈슨의 평가도 전혀 새삼스럽지 않다.  

“김원봉은…공산당에 가입하기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와 여운형은 민족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중도파였기에 공산당의 고질적인 전체주의와 소련의 권위를 거부했다.…김원봉은 자신이 공산주의자들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분명 기꺼워 하지는 않았지만 별 도리 없었다. 대개의 경우 대중 앞에서 급진적인 연설문을 읽기 거절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작성한 연설문을 김원봉에게 건네주면서 그대로 연설하기를 강요했다.” 
 

■둘째아들의 이름이 철근인 이유  

그러나 미군정이 박헌영·허헌·이강국 등 조선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검거령을 내리면서 김원봉 선생 등도 ‘민전’의 지도자라는 이유로 도매금으로 넘겼다. 그 과정에서 이 기사의 모두에 인용한 조선의용대 기록영화에 대한 백색테러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선생의 앞날이 가시밭길이 될 것을 암시한 사건이었다.  

김원봉 선생은 1946년의 총파업과 그해 10월의 대구 항쟁, 그리고 남로당 결성 등을 거치면서 미군정의 철저한 반공정책의 속죄양이 되어 탄압받았다.  

급기야 1947년 3월 22일 서울 청계천 은신처 화장실에서 체포됐다. 불세출의 독립운동 지도자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채 뒷정리도 하지 못한채 붙잡히고 말았다는 것이다. 김원봉 선생에게 수갑을 채운 자가 바로 악질 친일 경찰 출신인 노덕술이었다. 여기서 전해지는 구전은 노덕술이 선생의 뺨을 때렸다는 것이다. 
 

■노덕술에게 당한 수모  

노덕술은 독립투사를 때려잡는 악질경찰에서 해방 후에는 좌익분자를 색출하는 애국경찰로 둔갑해 있었다. 그렇게 노덕술에게 갖은 수모를 당한 김원봉은 의열단 동지인 유석현 선생(1900~1987) 앞에서 통곡했단다.  

“조국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놈들과 싸울 때도 한 번도 이런 수모를 당한 일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이런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의해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 있소. 내가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 지 몰라.”  

독립운동가 정정화 선생(1900~1991)의 회고록에도 “언젠가 약산(김원봉)이 왜정 때부터 악명이 높았던 노덕술로부터 모욕적인 처우를 받았다는 말을 듣고 민족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 분개했다”고 회고했다.  

게다가 노덕술에게 체포되었을 당시 선생의 22살 연하 부인인 최동선은 출산이 임박한 만삭이었다. 둘째는 선생이 철창에 구금되었을 때 낳았다고 해서 철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미군정청 경찰의 체포는 물론이고 해방정국은 무질서 그 자체였다. 이념과 이해관계에 따라 정적을 마구잡이로 암살하고 납치·구금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송진우(1945년 12월 30일)-여운형(1947년 7월19일)-장덕수(1948년 3월12일)에 이어 김구 선생(1949년 6월26일)까지 백색테러에 의해 암살되었던 시절이었다. 어느 한 편도 아닌 민족의 통일을 위해 좌우합작 운동을 끈질기게 폈던 선생의 목숨 역시 풍전등화였다. 




 

 1949년 2월18일 경향신문.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악질친일경찰 노덕술이 반민특위 특경대에게 붙잡히자 “노덕술이는 나라에 필요한 기술자이니 풀어주라”고 강권했다. 김상덕 반민특위위원장과 김상돈 부위원장이 이 대목을 지적하며 개탄하고 있다.


 

■“북행은 어쩔 수 없는 선택”  

노덕술에게 수모를 당한 뒤인 1947년 8월11일 미군정청 수도경찰청은 남로당과 민전 산하단체에 대한 폐쇄조치와 대대적인 검거를 단행했다. 김원봉 선생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미군정은 김원봉에게 ‘남로당 및 민전과의 관계를 끊도록’ 회유와 협박을 받았다. 게다가 1948년 3월8일 열린 ‘장덕수 살해사건’ 공판에서 피고인인 김석황은 “장덕수 살해 모의 과정에서 좌익의 김원봉·박헌영도 죽이기로 했다”고 진술했다. 뭔가 운신의 폭이 조금이라도 있었던들 북행을 결심할 이유가 없었던 김원봉이 아닌가. 북행은 선생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미군정 수도경찰청장인 장택상(1893~1969)이 일제강점기 독립자금 모금차 국내에 들어온 애국단원 박상진에 의해 부친(장승원)이 피살되자 그것에 불만을 품고 김원봉 등 진보적 해외지도자들을 구금한 것이 직접 원인이 되었다는 증언도 있다. 


1946년 여름 김원봉 선생이 경남 밀양의 표충사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다. 선생이 첫아들 중근을 안고 있다. 선생은 1947년 3월 부인이 만삭일 때 노덕술에게 체포됐다. 수감중에 둘째가 태어났는데, 철창에 있을 때 태어난 아들이라고 해서 철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김원봉이 쓰임받았다면 전쟁은 없었을 것”  

김원봉 선생에 대한 인물평 중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평이 하나 있다. 

“약산 김원봉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미군청정의 관리들도 선생을 두고는 “비공산주의 계열의 좌익지도자인 김원봉이…”라든가, “여운형과 더불어 민족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중도파였기에 공산당의 고질적인 전체주의와 소련의 권위를 거부했다”든가 하는 표현을 썼다. 특히 김원봉 선생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미군정청 관리는 “미국의 강력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한 사람을 잃은 것”이라고까지 했다.  

심지어 “만약 남북조선이 통일되었다면 북조선의 김두봉(1889~1961)과 남조선의 김원봉은 조선공산당에 반대해서 민족적 사회주의 노선을 따르는 조선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도 나왔다. 나아가 “그렇게 되었다면 통일협상은 성공적인 결론을 얻고 또한 내전(한국전쟁)까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까지 했다.  

임시정부를 담당했던 미 전략국 요원이었던 클레런스 윔즈의 ‘김원봉 보고서’는 “김원봉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단체들과 손잡고 일했다. 일례로 그는 황푸군관학교 졸업생들이 결성한 극우파인 남의사의 일원이었으며 그들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았다”고 썼다. 

김원봉 선생은 독립을 이룰 수만 있다면 그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었던 실용적 좌파 민주주의자였던 것이다. 모든 이데올로기의 장점을 가미하는 민주사회주의를 추구한….




소공동위원회(1945) 환영시민대회에서 연설하는 김원봉 선생. 당시 정치상황이 월북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월북은 민족주의자인 김원봉 선생의 인생에 큰 오점이 되었다.

 

 

 

 

 

■그럼에도 선생의 천려일실은 월북이다  

그럼에도 선생의 천려일실은 역시 월북이다. 충칭 시절 선생의 비서였던 사마로는 자서전에서 “북한으로 가지말라는 말에 김원봉은 ‘나도 그리 가고 싶은 곳은 아니지만 남한의 정세가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심지어 노덕술 같은 악질 친일경찰에게 수모를 당했으니 얼마나 엄청난 자괴감을 느꼈을까. 게다가 남한만의 단독선거 실시가 기정사실화하자 더욱 북행을 결심하게 되었을 것이다.  

김원봉 선생의 월북과 관련해서는 ‘당시 독립운동 경력의 소유자가 대부분인 북한 지도자 가운데 조선의용대 동지들이었던 이른바 연안파 인물들이 건재했던 것’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연안파의 리더였던 김두봉은 김원봉 선생과 같은 경남 출신이며 1930년대부터 자주 만나 국내외 정세를 두고 토론했다. 또 황푸군관학교의 교관이었던 최용건(1900~1976)과의 관계 또한 선생의 북행에 일조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분석이 있다.  

따라서 김원봉 선생의 월북은 “특별히 철학적 사상적 인생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남한에 있어봐야 정치적으로 큰 무엇이 없었고 지난날 관계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이북에 있고해서 이북으로 갔을 것”이라는 증언(독립운동가 정화암·1896~1981)이 이를 뒷받침한다.
 

■“정치인은 어쩔 수 없는 선택도 하는 것”  

선생이 월북한 것은 1948년 4월9일 이전이다. 선생은 김구·김규식 선생 등도 참석한 이른바 남북한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북한에 남는다. 당시 김원봉 선생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기자(설국환 합동통신 편집부장)에게 속내를 풀어놓았다. 

“내가 ‘공산당의 선전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 차라리 은퇴하라’고 하자, 그(김원봉 선생)는 ‘설 형의 충고는 가치가 있지만 정치하는 사람은 때로는 자기 뜻대로 못할 때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선생은 북한의 임시통일헌법을 통과시키기 위한 북조선인민회의의 특별회의에 배석함으로써 북한 정권 수립의 토대가 될 헌법 제정과정에 참여했다.  

선생은 북한에서 초대 국가검열상이 됐다. 검열상이란 감사원장격이다. 검열상의 내각서열은 수상-부수상-국가계획위원장-민족보위상에 이어 5번째였을만큼 높았다. 행정관료들에 대한 감사기관이었음을 감안하면 선생에 대한 배려가 컸음을 보여준다. 선생은 또 북한에서 남북으로 갈라진 민전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이라는 단일기구로 통합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는 박헌영·이승엽·홍명희 등과 함께 임정 요인을 비롯한 독립유공자와 정치인·학자 등의 저명인사들의 북한정권 참여를 권유하는 일을 맡았다. 후에도 납북인사들의 설득작업에 참여했다. 이 와중에 1952년 7월부터 무려 5년 4개월동안 노동상으로 일했다. 이후 조국통일민주주의 민족전선 의장단(1954년),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당선(1957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1957~58년) 등을 거쳤다. 

1957년 9월 노동상에서 해임된 선생은 1958년 9월9일 조소앙의 장례식 때 참여한 뒤 소식이 끊였다. 선생의 최후를 두고 여러 설이 나온다. 

 

 

 

 

1958년 3월20일자 경향신문. 노덕술은 1958년 4대 민의원선거 때도 출마예상자 명단(울산 남구)에 들어있었다. 정치에 입문하려고 끊임없이 노크했던 것이다.
 



 

 

 

그 중에는 1958년 10월24일 주북한 소련대사 알렉산드로 푸자노프의 질문에 남일(1913~1976) 외무상이 “청우당 위원장 김달현(1884~1958)은 김원봉(현재 체포된)과 연루됐는데 김원봉은 틀림없이 미국인들과 관계가 있는 것 같고 최근 체포되기 전에는 남으로 도주하기 위한 모든 대책들을 세워놓고 있었다”고 했다는 대담내용이 공개돼 있다. 한마디로 김원봉 선생은 북한에서 그 ‘쓰임’을 다해 국제간첩이라는 애매한 죄명으로 숙청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밖에도 장제스의 간첩이라는 설도, 옥중 자살설도 있다. 
 

■남한에서 몰상당한 가족 친척들  

남한에 남은 가족·친지들은 그야말로 떼죽음을 당했다. 9남 2녀의 형제 중 친동생 4명과 사촌동생 4명이 이른바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죽음을 당했고, 아버지 김주익은 외딴 곳에 유폐되었다가 굶어죽었다고 한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이다. 그러나 이 단체의 좌익전향자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빨갱이’라는 이유로 군과 경찰에 의해 떼죽음을 당했다. 의열단장과 조선의용대장, 임정 군무부장이었던 김원봉 선생이었지만 ‘월북 빨갱이’의 낙인이 이런 참사를 빚었다. 가히 왕조시대 역적 가문의 3족을 멸한 격이다. 
 

■김원봉 선생의 서훈논쟁 어떻게 봐야 하나  

그렇다면 최근 벌어지는 김원봉 선생의 서훈 논쟁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사실 2005년부터 사회주의 운동가라도 항일투쟁을 벌여 나라를 되찾는데 몸과 마음을 받친 분이라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 분들에게 유공자의 자격을 부여하기 까지 지난한 세월을 보냈다. 분단과 전쟁, 냉전이라는 엄중한 상황에서 아무리 독립유공자라 한들 사회주의자에게 서훈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객관적인 평가조차 힘든 판국이니 입도 벙긋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1980년대 이후 극단적인 논쟁이 난무하면서도 차츰 평정심을 찾아 사회주의 독립투사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이뤄졌다.  

결국 30년 가까이 논쟁이 벌어진 끝인 2005년 3·1절을 맞아 사회주의 운동을 벌인 인물 중에서 독립유공자를 가려 뽑았다. 사회주의 운동가 중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투쟁한 경우 이를 항일민족투쟁으로 인정하자는 사회적인 합의가 이뤄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이름으로 국가유공자 포상을 하려면 매우 중요한 조건을 충족해야 했다. 항일투쟁의 공적이 있는 사람이라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나 그후 존립에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이 그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포상하는데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사람에게 포상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를 부정하거나, 또는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한 인물은 포상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었다.  

그렇다면 북한정권에서 초대 국가검열상과 노동상을 지낸 김원봉 선생은 어떨까. 

북한에서의 행적을 보면 김원봉 선생의 독립유공자 서훈은 시기상조라는 이야기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 이유야 어떻든 북한정권 수립에 일조한 것은 확실하니까….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의 서훈결정에 30년의 숙려 시간이 흘렀으니, 김원봉 선생의 서훈 결정에도 상당한 기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노덕술은 1960년 제5대 민의원 선거에도 울산 갑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8명중 6등으로 낙선했다.

 

 

 

 


 

■‘노 놈! 노 놈!’ 노덕술을 저주하며 죽어간 독립투사들  

그러나 여기서 악질 친일 경찰이자 해방 후 김원봉 선생을 모욕했다는 노덕술을 떠올린다. 

노덕술이 누구인가. 일제 강점기에 혹독한 고문으로 독립운동가를 3명이나 죽였던 악질경찰이었다. 

예컨대 1927년 1월 부산 동래에서 발생한 이른바 혁조회 사건 당시 동래경찰서 사법주임으로 근무하던 노덕술이 김규직·유진흥 등 2명의 독립투사를 고문치사했다. 이 사건의 담당은 본래 고등계였지만 노덕술이 사건을 맡아 온갖 고문기술을 발휘했다. 고문을 받던 유진흥은 피를 토하면서 “노(盧) 놈! 노 놈!”하고 울부짖으며 죽어갔다고 한다. 또 1932년 5월 통영경찰서 사법주임 시절이던 노덕술은 5월1일 메이데이 시위에 참가한 반일단체 ML 당원인 김재학을 붙잡아 두 손을 뒤로 두발을 앞으로 결박해서 천정에 매달아놓고 구타하고, 혹은 입에 물을 들이붓는 혹독한 물고문을 자행하는 등 고문경찰의 시조가 되었다. 
 

■노덕술은 되고, 김원봉 선생은 안되는가  

그러나 해방 후 ‘경험자가 필요하다’는 미군정에 의해 이른바 ‘수사기술자’로, 수도청 수사과장으로 중용됐다. 독립투사를 잡는 일제경찰이었던 노덕술은 이제 빨갱이를 탄압하는 반공경찰로 변모했다. 김구 선생과 함께 항일독립운동의 대표주자인 김원봉 선생에게도 모욕을 주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대한민국 상훈’ 홈페이지에 기록된 노덕술의 상훈 기록. 한국전쟁 때 화랑무공훈장 2개, 충무무공훈장 1개를 받았다.

 

 

 

 



 

그런 노덕술이 1949년 1월24일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인사들에 대한 테러를 사주한 음모가 드러났다. 반민특위 특경대는 노덕술을 체포·구금했다. 그러자 이틀 뒤 이승만이 반민특위 임원들을 경무대로 불러 “노덕술은 나라를 위해 요긴히 쓰일 기술자이니 석방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마포형무소에 수감돼있던 노덕술은 결국 6월23일 만성기관지염을 이유로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얼마 후 공소기각으로 처리된다. 노덕술에 대한 단죄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노덕술은 1년 뒤인 1950년 헌병중령으로 이직하여 1사단 헌병대장과 부산 육군범죄수사대장(CID)으로 경력을 이어갔다. 이후 1955년에는 미 군수품 횡령 비호사건으로 장물운반 및 정치간여죄로 6개월의 실형(집행유예)과 파면의 징벌을 받았다. 노덕술은 이후에도 정치판을 기웃거리며 1960년 제5대 민의원 선거에 경상남도 울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하지만 1744표를 얻어 8명 중 6등으로 낙선했다. 그런 노덕술이 한국전쟁 때의 공로로 화랑무공훈장 등 세 차례 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을 이미 밝힌 바 있다. 악질친일경찰 출신의 노덕술이 단죄는커녕 국가가 주는 무공훈장을 세번이나 챙겼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노덕술의 상훈을 취소할 길도 없다. “현행법인 상훈법에서 친일행적이 있다고 서훈을 다 취소할 수는 없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즉 서훈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와, 국가 안전에 관한 죄를 범한 사람으로 형을 받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형법 등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금고형을 받은 경우 등이 아니면 서훈을 취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공훈장을 받을만 해서 상을 준 사람이기 때문에, 과거의 친일경력은 문제될 게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김원봉 선생은 어떤가. 해방정국에서 정치활동의 숨통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었던들 김원봉 선생은 북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미군정 및 우익세력의 위협 등이 ‘북행’의 주요 요인이 되었을 김원봉 선생이다. 

북한에서의 이력은 과연 의열단 의백이자 조선의용대장,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부장을 지낸 그 분의 공적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릴 것인가. 차분하고 심도있고 객관적인 논쟁을 한번 벌여볼 때가 됐다.
(이 기사에 주로 참고한 논문은 한상도의 ‘김원봉의 월북배경과 이후 정치활동 궤적’, <한국근현대사연구> 88집, 한국근현대사학회, 2019입니다. 이외에도 김삼웅의 <약산 김원봉 평전>, 시대의창, 2008과, 김영범의 <한국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창작과비평사, 1997, 문화방송 사사제작국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친일경찰 노덕술’, 2002 등도 참고했습니다.) 
 

경향신문 선임 기자 https://leekihwan.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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